항목 ID | GC056C03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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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근대 | 1949년 - 김기종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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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 1975년 - 김기종씨가 이순남과 혼인하다. |
현대 | 2000년 - 김기종씨 부부, 옥수수 농사를 시작하다. |
마을지 | 김기종씨 부부 집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대밑에길 13-2 |
[농사만 지어갖고는 전혀 생활을 못하지]
도장 마을 김기종, 이순남 부부는 마을에서 옥수수 농사를 가장 먼저 시작한 집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옥수수 농사를 짓는 집이기도 하다. 김기종, 이순남 부부는 옥수수 농사를 2000년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적게 심었는데 생각보다 수익이 괜찮아서 점점 규모를 늘려 작년[2012년]에는 이천 평에 옥수수를 심게 되었다고 한다. 김기종 씨 부부의 농사가 논 약 13,223㎡[4천 평]에 밭이 약 6,611㎡[2천 평] 규모이니 제법 부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따로 옥수수 농사를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다.
“농사를 지어갖고는 전혀 생활을, 문화생활도 못해. 우리부터도 한 오천평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이래저래 제치고 나면 일년 순 소득이 800만 원도 안돼. 한달에 이백 씩 쓴다고 하면 어떻게 사냐 이거여. 살 수가 없지.”
김기종 씨 부부와 같은 부농도 결국 부실한 농사소득으로는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받기 힘든 농촌의 현실이 결국 옥수수와 같은 밭농사에 매달리게 만든 것이다. 이 부부도 처음부터 밭에 옥수수를 심었던 것은 아니란다. 처음에는 다른 집처럼 콩이나 팥, 고추와 참깨를 심어 팔았는데, 콩 한 되를 농사지어 파는 것보다 옥수수가 훨씬 이익이 좋다고 한다.
“2012년에는 시세가 좋아가지고, 두 번째로 해갖더니 많이 받으면 이래저래 대충 잡아보니까 350만 원 정도 떨어졌드라고. 그러고 보면 나락농사만큼, 오히려 나락농사보다 더 나왔지.”
한 마지기[약 661㎡, 200평] 밭에 옥수수를 심어 소매로 팔면 적게는 팔십만 원에서 많게는 백만 원까지 수익이 나오는데, 그것이 세마지기 콩밭농사보다 소득이 더 좋게 나오고, 나락 농사보다 힘도 덜 들면서 수익도 비슷하게 나오니 옥수수가 효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벽 도깨비 시장에 가서 팔다]
옥수수는 3월 말에서 4월 초가 되면 씨를 뿌리는 것으로 본격적인 농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약 3개월 동안 중간 중간 순도 따주고 벌레도 잡아주는 작업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수확할 시기가 된다. 날씨가 한창 더울 때인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제철을 맞게 되는 것이다. 옥수수가 다른 밭작물보다는 농약도 거의 하지 않아 손이 덜 가지만, 세상에 어디 쉬운 일이 있던가? 옥수수가 복숭아만큼 알레르기를 일으키기 때문에 일을 하고 나서 씻지 않으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을 하게 된다고 한다.
옥수수 농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처럼 부부가 직접 소매로 팔지 않고 도매상에게 넘기는 식으로 했단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옥수수를 사먹는 값에 비해 도매가가 형편없이 낮은 것을 알고는 부부가 새벽마다 시장에 놓고 팔아서 수익을 냈었다고 한다. 그때는 밤 12시면 일어나서 가마솥에 옥수수를 넣고 한시간 반을 쪄내서 그것을 머리에 이고 새벽 다섯시 반 첫차를 타고 광주에 있는 남광주 시장에 가서 팔았단다. 본래 남광주 시장은 아침 9시에 열리는데, 매일 새벽 2시부터 8시까지 시장 주차장에서 반짝하고 열리는 ‘도깨비 시장’에 갖고 가서 팔았던 것이다. 하지만 잠을 못자는 고생이 너무 심해서 결국 쪄서 소매로 파는 방식을 포기하고 지금은 생 옥수수로 팔아버리고 만단다. 그렇지만 그렇게 고생한 덕분에 아직까지는 자녀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또 보태줄 수도 있으니 좋은 일이지 않냐고 하시면서 김기종 씨 부부가 환하게 웃는다.
[농사밖에 모르는 토박이 부부]
김기종 씨는 이곳 도장 마을 토박이다. 1949년에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외지에 나가서 살아본 적이 없단다. 27세 때 춘양면에 사는 22세의 처녀 이순남 씨와 중매로 혼인하였다. 부인 이순남 씨는 현재 도장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데, 시집와서 고생하며 살지 않았냐고 묻자 시댁이 그래도 논 여덟 마지기에 밭까지 모두 열한 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모르고 살았다고 하였다. 그래도 그 농사만으로는 2남 2녀의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는 학비 대기가 너무 벅차서, 남편 김기종 씨가 간간히 인근 공사장이나 사업장에 가서 품일을 해오는 방식으로 돈을 벌기도 했단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농사가 첫째요, 일이 있어도 마을에 행사가 있거나 공동으로 품앗이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마을 일을 먼저로 쳐서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마을 사람들이 돈벌이에 너무 급급한 나머지 예전처럼 마을 일에 적극적이지 않아서 걱정이 된다고 한다.
“물질을 벌면 서로가 나눔이 더 많아져야 한디 더 작아지더라고. 말하자면 뭐랄까. 내가 하루 힘들게 벌었잖아 돈을. 그런께 더 안으로 쥐고 조여들어. 옛날에는 차라리 암 것도 없었잖아요. 글고 품앗이해도 너 한나절 나 한나절 서로 했재. 서로 돈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이웃 간에 이러고 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이웃간에 일도 없어....”
그러면서 김기종 씨 부부는 한마디 덧붙인다. 마을이 앞으로 점점 도시화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농촌의 현실이라고.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도장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공동생활이 잘돼 있어서 아직은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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