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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007
한자 先史人-巨石文化
영어의미역 The Breath of Prehistoric Man, Megalithic Cultur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하문식

[개설]

거석 문화재는 어떤 목적에 따라 커다란 돌을 가지고 만든 구조물이다. 이것은 인류가 남긴 커다란 자취 가운데 하나이자 숭배의 대상으로, 이렇게 돌을 이용했던 문화를 일컬어 거석문화라고 한다. 이러한 문화 요소는 북유럽과 서유럽, 지중해 연안, 인도,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등 거의 전 세계적으로 분포한다.

거석 기념물은 선사 시대부터 축조되었으며, 그 속에는 많은 역사성이 담겨져 있는데, 특히 거석문화를 창조하였던 이들이 내세를 믿는 특정한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동시에 특정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유적들은 시간과 함께, 지역 또한 이 문화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거석 기념물은 사회적인 기반과 믿음의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추정된다. 다시 말해서, 뭔가 목적을 가지고 조성한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조사를 통해 추론해 보면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징, 성격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라는 것이다.

이렇듯 거석 기념물은 널리 알려진 무덤의 기능과 함께 농경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예, 곧 수확 이후 하늘에 대한 감사로 세운 기념물이 있고, 주변 집단 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승 공훈물이 있으며, 집단 내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기도 했다. 또한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하여 종교 의식에 필요한 신전을 만들기도 했다.

거석 기념물로는 고인돌, 선돌, 열석, 환상 열석, 석상, 돌널무덤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제천 지역에는 고인돌과 선돌 등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두 가지 거석 기념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고인돌 이야기]

고인돌은 거석문화의 대표적인 요소로 전 세계에 분포한다. 땅 위나 밑에 돌방[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기능은 대부분 무덤이지만, 공동 무덤을 나타내는 묘표석이 되거나, 종종 집단이나 공공의 모임 장소 또는 의식을 거행하는 제단으로도 이용되어 왔다. 고인돌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서는 탁자 모양을 한 탁자식, 바둑판 모양인 바둑판식, 맨땅 위에 덮개돌을 놓는 개석식 등이 많다.

[선돌 이야기]

1. 선돌의 형태

선돌[立石]은 길쭉한 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손질을 하여 세운 사람의 의지가 담겨 있는 돌기둥으로서 그 분포 범위가 상당히 넓다. 고인돌과 더불어 대표적인 거석 기념물로서, 한반도에서는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돌을 세웠거나 서 있다는 뜻에서 삿갓바위[笠岩]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 선돌백이, 구지바위, 할아버지나 할머니 탑, 돌장승, 수구막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선돌은 고인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대체로 무덤의 기능을 지닌 고인돌과는 달리 다양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보통이다.

2. 선돌의 기능

선돌의 기능은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입석이나 칠성, 성기 숭배에서 나타나듯이 다산·생산·장수를 바라는 뜻으로 농경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풍요를 기원하는 역할 이외에도, 마을 어귀에서 벽사·수구막이의 역할을 하는 수호자로서의 기능, 죽은 사람을 상징하거나 무덤을 표시하는 것은 무덤돌 역할도 한다. 이렇게 돌을 세워서 수호신으로서나 복을 비는 마음을 담은 조형물은 후대에 ‘미륵’이나 ‘탑’으로 변해 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라는 종교의 틀에서 그런 변화를 보인 것 말고도 선돌은 후대에까지 거석 숭배의 관습을 만들면서 농사와 축제, 장례 등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종교적인 의식의 중심에 있기도 한다.

[제천 지역 거석 문화재]

1. 제천 지역 고인돌이 보여 주는 특징

현재까지 제천 지역에서는 100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주로 남한강을 따라 형성된 강 주변의 충적 대지에 분포하지만, 드물게는 월악산 같은 산 능선의 끝자락에서도 발견된다. 선돌은 사실 그 기능이 고인돌과 달라서 보통은 마을 입구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종종 고인돌과 함께 있기도 한다.

고인돌이 들어서 있는 자리는 보통 그것을 축조한 사람들의 활동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청풍면 계산리·광의리·양평리에서는 고인돌과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던 집터가 발견되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한 곳에 여러 기의 고인돌이 떼를 이루고 있는 것도 제천 지역 고인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46기의 고인돌이 있는 황석리 고인돌떼를 비롯해 진목리 고인돌, 함암리 고인돌, 구룡리 고인돌, 능강리 유적에서는 여러 기의 고인돌이 한꺼번에 발견되는데, 이는 당시 사회에 보편적으로 유행했던 가족 무덤과 같은 공동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천 지역에서는 탁자식과 바둑판식, 개석식이 모두 조사되었으나 대부분은 개석식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황석리 고인돌떼의 경우 특이한 구조의 무덤방이 조사되었는데, 네 벽을 판자돌로 잇대어 만들고 긴 벽 쪽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판자돌을 세워 받침돌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은 이곳의 지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무덤방 옆에 딸린 방이 조사된 것도 제천 지역 고인돌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진목리 고인돌의 1·2·4호와 황석리 고인돌떼의 2·C·충6·충16호 고인돌에서 이러한 예가 발견되는데, 이는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의 내세관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 뼈의 경우 우리나라 고인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황석리 고인돌떼와 양평리 고인돌에서는 발견되었다. 특히 황석리 고인돌떼에서는 많은 사람 뼈가 나왔는데, 13호와 충7호에서는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발굴되었고, 12호·충13호·충17호에서는 조각들이 조사되었다. 여기서 수습된 인골은 우리나라 고대 민족의 기원 문제에 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2. 황석리 고인돌의 가치

제천 지역의 고인돌 중에서 특히 황석리 고인돌떼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충주댐 건설로 인해 지금은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일부분 자리를 옮긴 황석리 고인돌떼는 사람 뼈가 나왔다는 것 외에도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62년에 처음 발굴된 이 유적은 국립박물관에서 주관하여 조사한 전국의 중요한 고인돌 가운데 하나로, 13호가 특히 중요하다.

초기에 계획된 12기를 모두 발굴한 상황에서, 단 하나 남은, 그것도 덮개돌 부분이 파괴된 채 흙에 파묻혀 있던 황석리 13호 고인돌은 거의 덤인 듯 보였다. 하지만 기대 없이 시작했던 그날 발굴의 끝에 무덤방에서 나온 것은 사람 뼈와 간돌검이었다. 간돌검은 신석기 후반부터 청동기 시대까지를 아울러서 출토되는 유물인 만큼, 당시까지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증명해 주는 유물이 제대로 없어 혼란스럽던 한국 고고학의 역사를 일거에 정리시켜 준 발견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인들이 한반도는 석기 시대만 있고 청동기 시대가 없이 중국에서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즉 정상적인 역사 발전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발전했다는, 다시 말해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가 없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던 터에 그러한 주장을 불식시킬 수 있는 증거가 제대로 등장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으로 생긴 철기 시대, 곧 금석병용기 시대가 있었다는 오해 속에 살아왔던 한국의 역사에 청동기 시대라는 큰 고리를 연결시켜 준 중요한 고인돌이 바로 황석리 고인돌떼라고 할 수 있다.

황석리 고인돌떼에서는 민무늬 토기·붉은 간 토기·구멍무늬 토기 등의 토기와 화살촉·간돌검·바퀴날 도끼·돌도끼·반달 돌칼 등의 석기 및 꾸미개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황석리 고인돌떼에서는 여러 종류의 토기와 간석기, 대롱옥과 곱은옥의 꾸미개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3. 제천의 선돌

선돌 유적은 제천시 송학면 입석리·장곡리, 청풍면 황석리, 금성면 월굴리, 수산면 구곡리, 봉양읍 마곡리, 금성면 양화리 등지에서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구룡리 선돌황석리 선돌은 고인돌 유적과 함께 있어 묘표적인 성격을 지닌 거석문화의 한 요소로 보인다. 또한 황석리 선돌은 2기가 짝을 이루어 남한강 옆의 충적대지에 강을 바라보면서 자리하고 있었다.

발굴 결과, 선돌 둘레에 11개의 돌들이 타원형을 이루면서 둘러져 있었는데, 돌의 편편한 면이 위쪽을 향하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한 점으로 볼 때, 이곳에서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하거나 집단의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기할 것은 둘레에 돌려진 돌 옆에서 삼국 시대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지가 발견된 점이다. 이것은 거석 숭배의 전통이 역사 시대까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제천 지역 거석 기념물이 들려주는 이야기]

제천 지역 거석 기념물인 고인돌과 선돌은 남한강 유역의 고대 문화상을 규명하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한국 거석문화의 성격을 정립하는 데도 의미가 있는 유적이다. 이미 살펴봤듯이 황석리 고인돌떼는 한국 고고학의 중요한 자리를 맞추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완전한 사람 뼈와 무덤방의 특이 구조, 출토 유물, 가족 무덤의 특징들은 동북아시아 고인돌의 의미를 자리매김하는데도 중요하다.

선돌 역시 유적에서 조사된 특이한 구조의 둘레돌, 입석리 선돌처럼 선돌회를 조직하여 일정한 시기에 선돌을 위하는 행사를 하는 것 등을 증명하고 있어 이 지역의 독특한 거석문화를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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