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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011
한자 許浚-朝鮮-名醫-李公沂
영어의미역 Lee Gonggi, a Noted Doctor of Joseon along with Heo Ju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상우

[부자 2대 수의에 오른 어의 이공기]

한계군(韓溪君) 이공기(李公沂)선조 대에 『의림촬요(醫林撮要)』를 저술한 양예수(楊禮壽),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주 저자인 허준(許俊)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선조를 진찰한 조선의 저명한 어의이자 의관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수의(首醫)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어의로서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허준과 같이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봉해졌다.

한산 이씨 이공기는 임진왜란을 극복한 호성공신으로 책봉된 후 녹봉으로 제천의 토지를 하사받았는데, 그 후 한풍군 이영남(李英男)의 아들인 이빈(李霦) 계 후손들이 제천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제천읍지(堤川邑誌)』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의 문헌에는 제천에 이공기의 부조묘(不祧廟)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은 이병연(李秉延)이 지은 인문 지리서로서 제천권 훈신 조에 이공기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내의원선생안』과 『의과선생안(醫科先生案)』에 의하면 이공기의 아들 이영남도 의과 고시에 합격해 대를 이어 최고의 수의(首醫)의 반열에 오르면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선조를 호종하고 피난길에 오르다]

『선조실록(宣祖實錄)』 26년[1593년] 기사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 부상을 입은 명나라 군대의 파총(把摠)을 치료하기 위해 내의(內醫) 이공기를 파견하는데, 선발한 이유로는 여러 어의 가운데 이공기의 침폄술(針砭術)이 매우 능한 점을 들고 있다. “비변사가 아뢰었다. 명나라 군사 중에 전투에 나아갔다가 병이 들었거나 다친 사람으로 본 고을의 성안에 있는 자가 거의 수백 명에 이르는데, 그 중에 파총과 같은 사람은 병졸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탄환에 맞은 사람도 있고 칼날에 찔린 자도 있으며 불에 다친 사람도 있는데 의원을 보려 한다 합니다. 내의 이공기는 침폄술에 매우 능하니 그로 하여금 왕래하면서 치료하게 하소서[備邊司啓曰 天兵赴戰病傷人 在本州城中者 幾至數百 其中如把摠等人 非如卒伍之比。 或有中丸 或有刃剌 或有火傷 欲見醫員云。內醫李公沂 頗解針砭之術 使之往來治療].”

또한 『선조실록』 28년[1595], 29년[1596], 30년[1597], 34년[1601] 조에는 선조이공기·허준 등을 인견(引見)하여 침구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선조 34년에는 이공기허준과 침구 명의 허임(許任)과 함께 입진(入診)하여 침구로 치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30년의 기사는 이공기양예수·허준과 함께 선조를 침구 치료하는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밖에 『선조실록』에는 양예수·허준과 함께 이공기의 이름이 자주 거명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공기의 명성이나 서열이 양예수허준에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공기는 이미 1587년(선조 20) 선조의 병을 완쾌시킨 공로로 양예수, 안덕수(安德秀), 이인상, 김윤헌, 허준, 남응명 등과 함께 각기 녹피(鹿皮) 1영(令)을 하사받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공기의 성명이 당시 수의였던 양예수, 허준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를 호위하는 데 큰 공이 있어 공신으로 봉해진 호성공신 중 의관은 허준이공기뿐이다. 이공기가 받은 총애와 대우는 중인 신분에 속하는 의관에게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제천에 남아 있는 이공기의 발자취]

‘한계군 이공기호성공신교서 및 초상’은 교서 1첩과 초상 1폭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되어 현재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 있는 제천의병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원형 복원 및 보존 처리가 진행 중이다.

교서는 1604년(선조 37) 10월 한계군 이공기에게 내린 공신 교서이다. 비단에 두꺼운 선지를 포개서 붙여 만든 것으로 가로 19㎝, 세로 39㎝의 두루마리 형태이다. 임진왜란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진 훈호는 호성(扈聖)·선무(宣武) 두 가지인데, 임진왜란 당시 서울에서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한 사람을 호성공신으로, 왜병을 정벌한 장수들과 원병과 양곡 요청을 위해 명나라에 왕래한 사신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봉하였다. 이 교서에는 당시 선조가 호성공신에 봉한 1등 2명, 2등 31명, 3등 53명 등 모두 86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승지였던 신지제(申之悌)가 글을 짓고 명필 한호(韓濩)가 썼다고 전한다.

초상은 오사모(烏紗帽)에 단령(團領)을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 좌상(坐像)이다. 가슴에는 운안흉배(雲雁胸背)[조선 시대 정2품과 종2품 문관이 관복에 달던 흉배]가 부착되어 있으며, 학정금대(鶴頂金帶)[조선 시대 종2품 벼슬아치가 관복이나 조복에 띠던 띠]를 착용하고 있어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이공기의 품계는 종2품관으로 여겨진다. 영정과 교서 등의 일괄 유물은 원래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에 있는 한계군 영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2008년 제천시에 기증되었다.

[전장을 누빈 이공기의 삶과 의학]

제천의 의학 인물 이공기허준·양예수·허임에 비견되는 뛰어난 의술을 보유하여 명성을 떨쳤던 어의로 평가될 수 있다. 이공기의 아들 이영남 역시 수의(首醫)에 올라 부자 2대에 걸쳐 공신과 수의에 오른 것은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연이어 수의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한계군 이공기와 한풍군 이영남을 중심으로 제천의 한산 이씨는 대대로 한의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향후 한산 이씨 족보를 중심으로 보다 세밀한 연구를 진행하여 지금의 의학 인물로 그 명성과 업적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전쟁터에서 겪은 이공기의 의학적 경험이 『동의보감』 제상문과 침구편에 담겨져 있어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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