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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013
한자 -波濤-迫害-聖地-黃嗣永
영어의미역 The Shrine of Baeron which Pulled through Persecution as though Plowing through Rough Waves, and Hwang Sayeong
분야 종교/기독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여진천

[천주교 성지, 배론]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위치한 배론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성지 중 하나이다. 이곳은 초기 천주교인들의 피난처일 뿐만 아니라 황사영(黃嗣永)[세례명 알렉산데르]이 백서를 쓴 곳이며, 한국 천주교 신학교의 요람인 성 요셉 신학당이 있던 곳이다. 또한 한국 천주교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세례명 토마스]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이자,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 하나인 장주기(張周基)[세례명 요셉]가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배론은 왜 ‘금지된 수치스러운 마을’이 되었나]

1866년(고종 3)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의 배론은 6개 마을, 즉 아랫배론과 중담배론, 웃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비득재로 나뉘어 70여 호가 살았다. 배론은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 기슭의 백운산구학산의 연봉이 둘러싼, 쉽게 접근하기 힘든 험준한 산악 지대에 위치해 있다.

배론이라는 지명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원래 배론은 이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한문으로 ‘배 주(舟)’ 자에 ‘골짜기 논(論)’ 자를 써서 초기에는 주론(舟論)이라 불렀다가, 주[舟]가 배를 의미하는 것이라 해서 쉽게 부르기 위해 주를 배로 바꿔 ‘배론’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등을 거치면서 조선 조정에서 천주학을 하는 무리들이 사는 ‘금지된 수치스러운 마을’이라 하여 배론(排論)[배척해야 할 땅]으로 불렀다고 한다. 배론은 제천에서 13.9㎞, 원주에서 35㎞ 거리에 있으며, 행정 구역으로는 제천시 봉양읍 구학2리이고, 면적은 723.54㎡이다.

[제천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기까지의 배론 이야기]

병인박해 당시 배론을 포함한 제천 지역에서는 천주교인들이 소유했던 토지가 모두 관에 몰수되었다. 그러나 1886년(고종 23) 6월 4일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자, 장호원 감곡본당의 초대 주임이던 부이용 신부의 노력으로 몰수된 천주교회와 신자들의 땅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배론은 다시 천주교 신자촌이 되었으며, 1928년에는 이윤상[세례명 베드로]이 배론신학교 부근의 개인 소유 산림 646정보를 경성교구 유지재단에 증여하여 여러 천주교 시설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동안 다시 한 번 배론은 신학교로 사용하던 가옥을 빼앗기는 등 교세가 기울어졌다. 1861년 6월에 사망해서 최양업 신부의 묘소도 돌보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해 갈 정도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 배론은 재정비의 기회를 가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배론을 다시 살리자는 분위기 속에서 최양업 신부의 묘역이 정비되고 묘비가 세워졌다. 이후 6·25 전쟁 이후 배론은 서울대교구의 관할에서 원주교구가 설립된 후 원주교구 소속으로 바뀌면서 배론에 속한 약 6.61㎢에 달하는 산림과 전답이 천주교 원주교구 유지재단의 소유가 되었다.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는 1970년부터 이 배론에 관심을 갖고 성지 개발 사업 추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오늘의 성지 배론의 초석을 세워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최양업 신부의 묘소와 함께 조선에 생긴 첫 신학교와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하는 교우촌으로 형성된 배론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조선 후기와 개항기 우리 역사의 한 면을 조명하는 동시에 제천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제천 배론성지 경내에는 종교 시설로서 순교자들의 집과 성 요셉 성당, 황사영순교현양탑, 사제관과 경당, 최양업신부기념성당 외 봉쇄수녀원 등 많은 건물들과 있으며, 사회 복지 시설인 살레시오의 집이 있다.

[제천 배론성지와 함께 기억해야 할 「황사영백서」]

배론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이른바 「황사영백서」 사건 때문이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2월 황사영은 체포령을 피해 서울을 빠져나와 원주·영월·영춘을 지나 예천으로 내려갔다가 순흥·영월을 거쳐 제천 무도리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4월 중순경 배론에 도착하여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한 황사영은 옹기점 옆에 토굴을 파고 8개월 동안 숨어 지내기도 했다. 황사영은 배론에 있으면서 김한빈·황심·송재기로부터 박해의 진행 상황을 들었고, 교회의 재건 방안을 생각하거나 글을 쓰는 일로 소일하였다. 이때 그가 작성한 기록들이 백서 작성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그 해 8월 23일, 황사영황심에게 천주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와 여러 사람들이 조정의 명령으로 고문, 처형되었다는 이야기, 특히 원래부터 친분이 있던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의분을 이기지 못해 중국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 즉 백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측근이던 황심이 9월 15일에 체포되고, 그가 황사영 및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던 배론을 발설하게 되면서, 황사영은 배론에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9월 29일 체포되고 백서 또한 압수되었다.

이후 조선 조정은 황사영이 쓴 백서에 서양 군함의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들어 이제까지 들은 적이 없는 흉서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백서 제작의 장본인인 황사영에게는 악독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천륜과 인륜을 어긴 성질이 매우 흉악하고 몹시 약한 대역부도의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결국 황사영은 27세의 젊은 나이인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처형 이후 재산은 전부 몰수되었고,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마리아는 제주도로, 아들 황경한은 영광군 추자도로, 숙부 황석필은 경흥으로 유배되었으며, 노비 다섯 명은 관노비로 몰수되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박해에 의해 빈사 상태에 처한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려면 외국의 군대가 군사적으로 원조를 해 줘야 한다는 자신의 사견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청나라에 의존하여 신앙을 얻는 방안을 포함한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 등 5가지 의견을 제시하였다.

비록 그가 외세에 의존해 조정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막아 보겠노라는, 정세 판단의 한계를 보여 주는 시도를 했다고 하지만, 「황사영백서」는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생생한 기록과 함께, 천주교 박해가 종교적인 이유, 그리고 침략을 노리는 외세와의 저항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당파 싸움에도 이용되었음을 알리는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국 천주교회가 200여 년 만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낸 것은 제천 지역에 자리 잡은 제천 배론성지 등과 많은 천주교인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선교 3세기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시작한 한국 교회에 사명이 있다면 남북으로 갈라진 현실 속에 민족의 복음화와 교회의 쇄신, 더 나아가 신학의 토착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은 공의회의 가르침대로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 현실에 맡게 적용시키는 데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역사를 이해함으로서 오늘날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선조들이 보여 주었던 모범을 따라 오늘의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의 생활을 연구하고 그 순교 정신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여기에 더욱 중요한 일이 있다면 교회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는 일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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