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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232
한자 月林里
영어음역 Wollim-ri
이칭/별칭 원리,원림부곡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변천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변천 시기/일시 1980년 4월 1일연표보기
변천 시기/일시 1991년 1월 1일
변천 시기/일시 1995년 1월 1일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5.49㎢
가구수 165가구
인구(남, 여) 383명[남자 189명, 여자 194명]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고려 시대에 원림부곡(員林部曲)이 있던 곳이므로 원리, 원림부곡 또는 월림이라 하였다. 풍수지리상 마을 생김새가 ‘월(月)’자형이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마을 중시조가 영일 정씨 월림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영일 정씨 시조 포옹(抱翁) 정양(鄭瀁)이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 때 꿈에 달이 숲으로 떨어졌다는 설도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제천군 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대티리와 청풍군 북면 월림리 일부를 통합하여 성산면 월림리가 되었고, 1917년 금성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제원군 금성면 월림리가 되었고, 1991년 1월 1일 제원군의 명칭이 제천군으로 환원되면서 제천군 금성면 월림리가 되었다. 1995년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월림저수지 서쪽 진리와의 경계에 358.2m 고지, 서북쪽 봉양읍 삼거리와의 경계에 397m 고지, 북부 산곡동과의 경계에 490.4m 고지, 490.4m 고지 동쪽 한티재 부근에 382.9m 고지가 솟아 있다. 358.2m 고지와 397m 고지 사이에 아니고개가 있고 위림리에서 안월림[일명 달밭]으로 이어지는 모래고개가 있다. 옛날에는 월림리에서 산곡동을 거쳐 제천으로 갈 때 벚고개를 넘어야 했으나 지금은 이용하지 않는다. 반정에서 구룡리로 넘어가는 반정고개는 청풍과 제천을 잇는 고개이며, 지름고개는 구룡리에서 월림리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월림2리 1번지에서 흘러내리는 월림천이 하천 유역에 좁은 곡저 평야를 이루면서 새터[일명 신대, 한티재, 대티리] 남쪽에서 고교천으로 흘러든다. 안월림에 있는 월림저수지는 1955년에 축조한 이래 위림리·월림리·양화리 일부와 구룡리 일대의 농지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현황]

월림리금성면 중앙부 북단에 자리 잡고 있다. 2009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5.49㎢로 이 중 경지 면적은 논이 0.67㎢, 밭이 0.46㎢이며 총 165가구에 383명[남자 189명, 여자 19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양화리, 서북쪽으로 봉양읍 삼거리, 서남쪽으로 위림리, 북쪽으로 산곡동과 이웃한다. 월림1리·월림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자연 마을로 안월림·큰말·아니고개·반정·골말·새터 등이 있다.

새터에 고속국도 55호선[중앙고속도로] 남제천 IC가 개설되어 있고, 위림~시곡 간 군도 9호선이 고속국도 55호선과 거의 나란하게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지난다. 관내에 리도 205호선, 농도 301호선, 농도 303호선, 농도 304호선 등이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서남쪽에 새터, 새터 서북쪽 골짜기에 골말, 서쪽 골짜기에 안월림, 새터 서쪽에 반정이 터를 잡았다. 반정은 옛날 제천현과 청풍부를 잇는 교통로의 중간 지점으로 반목 또는 반절이라고도 하였다. 청풍 부사가 제천현을 순시하거나 제천 현감이 청풍 부사에게 가던 길목이어서 가마를 멈추고 목을 축였던 곳이다. 반정에서 제천장과 청풍장까지의 거리가 각각 20리로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새터에 1999년 설립된 장애인 요양 시설인 요한네집이, 안월림에 연일 정씨 종가로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된 제원 정원태 가옥이 있다. 한적골에는 구한말 의병대장 송윤 정운경의 신도비와 묘가 있다. 1940년대까지 남한강 북진나루에 소금배가 닿았고 북진나루를 이용하여 청풍장으로 가는 것도 가능하였지만 월림리 주민들은 한티재를 넘어 제천장을 많이 이용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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