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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584
한자 古墳
영어음역 Gobun
영어의미역 Ancient Tomb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강민식

[정의]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삼국 시대 무덤.

[개설]

고분은 고대 사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문헌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고분 자료가 전하는 당시의 문화 양상은 역사 해석에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제천 지역의 고분은 1980년대 초반 충주댐 수몰 지구 문화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많은 사례가 확인되었다. 당시 청풍면 양평리송학면 도화리 등지에서 남한강 주변의 충적지를 기반으로 이곳에 흔한 강돌을 이용하여 묘곽을 만들고 다시 봉분을 덮은 적석총[즙석봉토분]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북한강 유역에서 확인된 사례에 비추어 고구려계 적석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어 이 지역의 문화적 연원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청풍면 황석리의 석곽묘에서 발견된 인골과 치아는 매장 인물의 성별과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 밖에 제천시 일원에는 정식 학술 조사를 거치지 않았지만 다수의 고분군이 발견되어 제천 지역 고대 문화의 양상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고분의 변화 양상]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제천 지역은 신라의 삭주(朔州) 내제군(奈隄郡)으로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奈吐郡)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본래 고구려의 영현이었다가 신라 소속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제천이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된 것은 5세기 초 이후의 사실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까지 이 시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유적과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보다 앞선 시기인 삼국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적석총[즙석봉토분]이 남한강 주변에서 발견되어 고구려 혹은 말갈(靺鞨)과 관련된 유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청풍면 계산리도화리·양평리·연곡리 등지에서 발견된 적석총은 충주댐 수몰 지구에 대한 문화 유적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으로, 강안 충적지를 그대로 이용하여 강돌과 산돌을 이용하여 전체를 덮은 뒤 분구의 중심부에 묘곽을 만들고 봉분을 덮은 형태를 보인다. 이곳에서는 고구려계 회백색 토기편이 수습되기도 하여, 묘제와 함께 북방 계통의 문화 요소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황석리 고분에서 확인된 5기의 석곽묘는 길이 1.5m 내외의 크기로 밀집된 가족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발굴 보고서에서는 청동제 허리띠 장식을 통해 고구려계통의 유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삼국 시대의 고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최근 지표 조사 등을 통해 제천시 일원에서 삼국 시대 고분으로 여겨지는 유적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고암동·두학동·모산동 일대는 속칭 고려장터로 알려지고 있는 곳으로, 능선의 남쪽 말단부나 능선의 평탄부에 고분이 위치하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최근까지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확인된 제천 지역의 고분 문화는 삼국 시대 초기 적석총이 독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신라의 진출 이후의 무덤이 확인되고 있는 있는 상황이다. 향후 조사가 진행되면 제천의 고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조사 보고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강 변 고분 현황]

제천 지역의 고분 문화는 두 번에 걸쳐 확인되었다. 먼저는 충주댐 수몰 지구의 문화 유적에 대한 지표·발굴 조사이고, 두 번째는 제천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및 유적분포지도 제작 등 최근 들어 시행된 지표·발굴 조사로 나눌 수 있다. 충주댐 수몰 지구 조사를 통해서는 많은 문화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남한강 변에 분포한 다수의 적석총을 특징으로 한다.

1982~1983년 충주댐 수몰 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발견된 계산리 고분은 충적지의 한 분구 내에 3기의 적석 무덤이 순차적으로 조성된 유적이다. 1호분은 직경 9.3m 크기의 호석렬을 두르고 내부에 강돌을 깔아 무덤방을 만든 구조로, 내부에서 무문토기편과 삼국 시대 토기편 및 철편 등이 수습되었다. 2호분은 직경 6m 크기의 호석을 조성한 후 내부에 네모꼴로 3×2m 크기의 구획을 설정한 형식이다. 내부에서 고구려계의 회백색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3호분은 직경 6.6m 크기의 둘레돌을 두른 후 내부에 강돌과 산돌을 채워 넣은 형식으로 중앙에 네모꼴의 묘곽을 설치한 모습이다. 내부에서 삼국 시대 토기편이 발견되었다.

도화리 고분은 최대 직경 30m 크기의 대형 적석총으로 충적지 위에 강돌을 덮은 후 정상부에 2.8×2.1m 크기의 석실을 조성한 형식이다. 석실 내부에서 인골 약간과 철도자 1점이 출토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원저단경호를 비롯한 철기류와 관옥류 등이 수습되어 백제 혹은 고구려계 문화 요소의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양평리 고분은 2기가 조사되었는데, 1호분은 최대 직경 29m, 2호분은 60m의 크기로, 2호분의 경우 남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적석총 중 가장 크다. 두 기 모두 남북 방향의 강안 충적지 위에 강돌을 깔고 중심부에 묘곽을 설치한 구조이다. 보고자는 타날문 원저단경호, 환두도자, 철도자, 철겸, 철모, 철부, 청동방울 등 출토 유물을 통해 2~3세기대의 고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연곡리 고분은 강안 경작지 사이에 남아 있는 분구를 이용하여 무덤을 축조한 형태로, 여타 적석총과 같은 구조를 보이지만 묘광을 조성하면서 분구 중앙을 파내고 대략 2×3m 크기의 네모꼴로 판축을 한 다음 돌을 이용하여 직경 4m 크기의 구획을 정한 특이한 형식을 보인다. 내부에서 고구려계 백색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황석리 고분에서는 모두 5기의 석곽묘가 조사되었다. 충 26호를 제외하면 4기가 모두 밀집되어 나타나 가족묘로 이해하고 있다. 서낭 1·2호, 3호, 4호, 충 26호로 명명된 유구는 모두 석곽묘로, 대체로 길이 1.5m 이내의 크기로서 내부에서 인골·치아 편과 청동제 허리띠 장식 등이 수습되었다. 내부에서 확인된 인골과 치아를 통해 50대 초반 남성과 60대 이상 여성[서낭 1·2호], 9~10세의 유아[서낭 3호]로 판단되었으며, 고구려계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와 같이 청풍면 일원의 남한강 변에서 조사된 고분은 적석총과 석곽묘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체로 분구 내에서 고구려계 토기편을 수습함으로써 북방계 문화 요소의 유입을 설명하는 자료로 주목할 수 있다.

[그 외 지역의 고분 현황]

최근 지표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고분군 중 고암동 무덤실 고분군은 이미 고려장터로 알려지고 있던 유적으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의 평탄지에 다수의 고분이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10여 기 정도의 석실분이 보고되고 있는데, 현재 석재가 드러나 있고, 숲 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점차 원형을 잃어 가고 있다.

모산동 고분군의림지에서 뻗어 나온 능선의 가장 끝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수원과 밭으로 개간되면서 크게 파괴된 유적이다. 앞서 삼국 시대 고분군으로 보고되었으며, 현재 유구의 흔적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두학동 알미 고분은 대체로 독립된 석실분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도로가 개설되면서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 고분은 마을의 지명 유래와 관련된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조사 없이 파괴되어 자세한 크기나 특징을 파악할 수 없다.

지표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유적의 경우 정확한 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가 기대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 계통의 유구가 거의 전무한 상태여서 제천 지역 고대 사회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한계로 작용한다. 다만 신라 계통의 문화 요소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1996년 왕암산업단지 부지에 대한 지표 조사에서 수습된 적이 있다. 여기서 발견된 굽다리뚜껑잔은 뚜껑이 없어진 완전한 형태로 높이 4.8㎝, 입지름 12.2㎝로, 6세기 중후반으로 시대를 잡을 수 있다. 이곳은 제천시 왕암동 159-1번지의 남향한 능선의 경작지로서, 이곳에 신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제천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 지역으로 일찍부터 고구려의 남하 통로 상에 위치하며, 남한강 수운을 통한 다양한 문화 요소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특히 남한강 충적지 위에 조성된 적석총은 백제·고구려 계통의 문화 속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북방계 유이민의 남하 혹은 사료상 말갈의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백제·고구려의 지배와 관련된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가 미비한 상태이며, 6세기 이후 죽령을 통한 신라의 진출 이후 고대 문화의 양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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