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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626
한자 上德周寺址
영어음역 Sang Deokjusaji
영어의미역 Sangdeokjusa Temple Sit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인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51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3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연표보기
소재지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 지도보기
성격 절터
관리자 덕주사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고려~조선 시대 절터

[개설]

587년(진평왕 9)에 창건되었다는 구전과 덕주부인이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지만 이를 증명할 만한 기록이나 유물은 없으며, 유적 내에 확인되는 유물을 토대로 할 때 고려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까지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가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근래 중창된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3번지 덕주사가 위치한 곳이 하(下) 덕주사지이며, 제천 덕주사 마애 여래 입상이 있는 곳이 상(上) 덕주사지이다.

[변천]

587년에 창건되었다는 구전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과 유물이 없고, 유적에서 수습되는 석탑 기단 석재와 옥개석[지붕돌] 기와편 등 유물의 상한선이 고려 초기인 점을 볼 때 창건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증지수좌관오묘지명(證智首座觀奧墓誌銘)』에 “□□사급원당충주덕주사 소집산승 상치축성도량( □□寺及願堂忠州德周寺 召集山僧 常置祝聖道場)”이라는 기록을 있다. 즉 유가종(瑜伽宗) 고승 관오(觀奧)[1096~1156]가 당시 원당이었던 덕주사에서 산승(山僧)을 불러모아 국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성도량(祝聖道場)을 설치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전기에 덕주사가 왕실과 깊은 관련 속에서 운영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덕주사가 상·하로 구분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하 덕주사지에서 발견된 금구를 통해 볼 때 고려 후기에 이미 상 덕주사(上 德周寺)와 하 덕주사(下 德周寺)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금구에는 “태화 6년 병인년 8월 21일에 상 덕주사 금구 하나를 만든다.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태화 6년인 1206년 당시 상 덕주사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덕주하사(德周下寺)를 승통소(僧統所)로 하여 삼남(三南)의 승군(僧軍)을 번갈아 교대로 지키게 했다"[『진재집(進齋集)』「한훤관방방략(寒暄關防方略)」]라는 기록을 통해 하 덕주사가 승병의 통괄하는 승통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상 덕주사와 관련해서도 "덕주상사(德周上寺)를 수리하여 된장과 소금을 많이 예비하는 일을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예와 같이 한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1800년대 후반 하 덕주사와 함께 상 덕주사도 국가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기능을 갖춘 사원으로 활용하고 있던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법맥을 이어나가던 상 덕주사하 덕주사는 6·25 전쟁 당시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한다.

[위치]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번지로,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으로 오르는 능선의 동쪽 계곡부에 있으며, 제천 덕주산성의 상성(上城)에 포함된다. 하 덕주사에서 영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20여 분을 가다보면 제천 덕주산성 중성의 문지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 다시 등산로를 따라 10여 분 더 오르면 제천 덕주산성 상성과 상 덕주사의 커다란 축대가 나타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제천시에서는 유적과 유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1993년과 1999년에 덕주사 주변 지역에 대한 정비 공사를 하였고, 2002년 11월 18일~2003년 9월 21일에 제천 덕주사 마애 여래 입상에 대한 정밀 실측 조사와 함께 석축 등을 정비하였다.

아울러 소실된 극락전 복원 공사에 앞서 극락전과 주변 유구의 명확한 형태와 학술적 자료의 파악을 위해 충청대학 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였고, 2004년 7월 27일~9월 24일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상 덕주사의 극락전은 최소한 두 차례에 걸친 건물 건립과 여러 차례의 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건물지 기단토 내에서 이전 시대의 기와가 작은 파편 상태로 출토되는 점을 감안할 때 극락전이 상 덕주사의 초창기 유적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극락전이 처음 건립된 시기는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데, 유구의 기단토 내에서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기와편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구는 극락전의 서쪽 기단 바깥쪽 열을 제외한 극락전 건물 전체와 서쪽 석축 하단부 등이다. 현재의 유구 중 서쪽 초석열의 가장 남쪽과 바로 위의 초석, 북쪽 초석열의 중간 초석 등은 두 번째 건립 때 보수된 것이다.

또한 극락전이 중창된 시기는 유구의 기단토 내에서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편년되는 백자편이 출토된 점을 감안할 때 조선 후기인 17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특히 다량으로 출토되는 ‘건륭구년(乾隆九年)’명 암막새와, 18세기 제작된 것으로 편년되는 백자편 등을 토대로 할 때 1744년(영조 20)에 중창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중창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건물의 구조와 형태는 크게 변형되지 않았다.

극락전 남쪽의 부속 건물지는 기단토 내에서 조선 전기와 후기로 편년되는 기와편이 관찰되지만 극락전과 축선이 맞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극락전이 건립되고, 중창되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구층 위로 퇴적층이 쌓이고 그 위를 극락전이 소실되면서 형성된 소토층이 덮인 것으로 보아 극락전보다 먼저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극락전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1차 유구는 동서 9.6m, 남북 14.5m이고, 중창 유구는 동서 11m, 남북 14.5m이다. 초석 중심을 기준으로 한 건물 내부의 크기는 동서 7m, 남북 10.5m이다. 초석 중심 간 거리는 정면과 측면 모두 350㎝이고, 내진주 초석의 동서 간 폭이 130㎝이다. 내진주 초석열 전면에는 장대 석재로 조성한 불단지가 확인되었다. ‘ㄷ’자 형태를 띠고 있으며, 동서 방향의 폭이 146㎝이고 남북 방향이 220㎝이다.

우리나라 매장 문화재 발굴 조사 이래 최초로 한글과 한자(漢字)가 함께 쓰인 명문암막새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유물의 제작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유물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명문의 내용은 “건륭구년갑자삼월일시주청신녀난신거사난□(乾隆九年甲子三月日施主淸信女奻信居士奻□)”라고 하여 제작 연대와 시주자에 대한 내용을 한자로 양각하고, 왼쪽에 “□새시쥬통졍태부옥[?]리”라는 내용을 한글로 음각하였다. 이 조사에서는 많은 양의 ‘건륭구년(乾隆九年)’명 암막새가 출토되었는데, 이중 한자와 한글이 병기된 명문 암막새는 단 1점뿐이다. 건륭구년(乾隆九年)은 1744년(영조 20)으로, 그해 3월에 ‘청신녀’와 ‘난신거사’, 통정대부의 가솔로 추정되는 이가 기와를 시주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한글 명문에는 통정대부가 누구인지를 밝힐 수 있는 단서가 없고, 집안의 누가 어떤 형태로 시주를 했는지도 알 수 없으며, 다만 당시의 덕주사와 어느 통정대부 가문의 연관성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현황]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줄기의 남향 골짜기에 석축을 축조하여 대지를 조성하고, 상단 대지 중심의 우뚝 솟은 바윗면에 높이 14.135m의 제천 덕주사 마애 여래 입상을 조각하였다. 상 덕주사지의 공간 배치는 제천 덕주사 마애 여래 입상을 중심축으로 하였고, 외형적 형태는 동서 방향이 남북 방향보다 약간 더 긴 장방형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층이 지는 계단식 지형이다. 제천 덕주사 마애 여래 입상 앞의 대지는 크게 3단으로 나뉘고 중단 대지는 서쪽 지역을 약 50㎝정도 낮게 조성하였다. 상단 대지와 하단 석축 아래 지면과의 높이 차이는 약 9m로, 이 지역을 대지로 조성하기 위해 많은 양의 돌과 흙과 노동력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천 덕주사 마애 여래 입상 남쪽에는 예불을 위한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일부 초석만이 남아 있고, 동쪽에는 요사채 터가 남아 있는데 8매의 초석이 확인된다. 대지의 남동쪽에 최근에 건립한 형태의 요사채가 있다.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의 서쪽 지역에는 높이 8m, 전면 길이 19m, 측면 길이 12m의 축대를 쌓고 상면에 최근 복원한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북쪽 경사면의 상단 대지에서도 작은 규모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건물지의 위치와 규모로 볼 때 산신각지로 추정된다. 제천 덕주사 마애 여래 입상이 새겨진 바위의 상면과 극락전 앞에는 부도가 각기 1기씩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덕주사는 고려 시대에 왕실의 원당(願堂)이었으며, 덕주상사와 덕주하사로 운영되었다. 특히 덕주사가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승병을 통괄하는 군사적 거점 역할을 하였던 점이 주목되는데, 덕주사가 있는 월악산 지역은 예부터 경상도와 남한강을 연결하는 계립령, 문경새재 길이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현재 덕주사를 포함해 주변의 수많은 유적, 유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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