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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641
한자 城郭
영어음역 Seonggwak
영어의미역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백종오

[정의]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있는 흙이나 돌로 축조된 전통 시대 방어 시설.

[개설]

성곽(城郭)이란 보통 성(城)을 뜻하지만 내성(內城)과 외곽(外郭)을 함께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적인 재해로부터 성안의 인명과 재산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인위적 시설을 말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여기에는 성벽뿐만 아니라 성벽 밖에 설치된 해자 등의 시설, 성벽에 설치된 각종 시설물, 그리고 성벽 내부에 형성된 행정 및 주거 등의 모든 시설을 포함한다.

일찍이 양성지(梁誠之)는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고 하였고,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성곽은 예부터 험하고 요해한 곳에 설비하여 국토를 보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라 하여 성곽의 중요성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외환(外患)과 전란(戰亂)이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능히 국가적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산성 제도 때문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중요한 길목의 큰 산줄기나 요충지, 도성을 비롯한 중요한 고을과 국경, 해안, 강안의 산에 많은 성이 축조되었다.

[변천 및 형태]

우리나라의 경우 고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삼국은 모두 강이나 하천을 낀 평지성과 배후에 산성을 구축하는 특별한 체제를 갖추었다. 제천 지역은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이르는 전 시기에 성곽이 축조되었다. 대표적인 평지 토성인 청풍토성을 비롯하여 성산성, 작성산성, 금성면대덕산성, 송학면대덕산성, 황석리산성, 제천 청풍 망월산성, 제천 덕주산성, 감암산성, 제비랑산성, 와룡산성, 견제산성, 저산성, 가은암산성, 비봉산 보루 등 많은 산성과 보루가 남아 있다.

제천 지역은 원래 마한에 속했던 지역으로 여겨지는데, 이를 처음으로 장악한 것은 백제였다.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은 성곽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백제는 1세기 중엽 한강을 거슬러 올라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백제의 다루왕은 신라와 10여 년에 걸쳐 공방전을 거듭했고, 따라서 이 시기 제천 지역에 관방 유적이 축조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3세기 중엽에 이르러 제천 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와의 공방이 심화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축성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백제 고이왕은 255년 9월 괴곡(槐谷)에서 신라군을 공파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의 봉산성(峰山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278년에는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괴곡성과 봉산성은 지금의 청풍과 단양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하므로 제천 지역에서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쟁탈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왕이 한강 상류의 단양 영춘 지역까지 진출하고, 뒤를 이어 장수왕이 계립령과 죽령을 넘어 경상북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제천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이처럼 삼국 시대 제천은 세 나라의 경계 지역으로 인식되었는데, 551년 나제 동맹을 통해 제천 지역을 상실한 고구려는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즉,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출전한 영양왕 대의 온달(溫達)의 기록과 보장왕김춘추(金春秋)를 억류하면서 “마목현[계립령]과 죽령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던 기록에서 제천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관심을 알 수 있다.

제천 지역의 중요성은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기 위한 신라의 노력에서도 알 수 있는데, 문무왕 13년 8월에 청풍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성장한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견고한 성곽의 축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는 매우 발달된 축성술을 갖추고 있었다.

통일 신라 시대 오소경(五小京)이 정립되면서 제천 지역은 내토군(奈吐郡)에서 내제군(奈堤郡)으로 명칭이 바뀌어 청풍현적산현을 영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 시기가 되면 낮은 구릉의 읍성과 그 배후의 산성으로 이루어지는 배치가 정형화되는데, 제천 지역에서는 청풍토성이 주목된다. 이러한 경향은 고구려식 산성입보의 방법이 남쪽으로 확대되면서 도읍의 기본적인 구성은 물론 지방 도시까지 같은 계획 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통일 신라 시대에 완성을 본 축성술은 고려 시대가 되면서 읍성과 산성이 분리되는 양상이 두드러졌고, 산성은 대규모의 대피용으로 이용되었다. 즉 몽골의 6차 침입 때 적군을 물리쳤던 제천 덕주산성의 예처럼 이 시기 읍성과 산성이 분리되면서 산성은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축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벽의 높이가 낮아지고 성벽의 너비도 좁아지며 성돌도 규칙성이 흐트러졌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성곽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조선 전기에는 국경 지대에 성곽의 축조가 집중되었고, 내륙에는 읍성이 대대적으로 축조·정비되면서 내륙 산성의 기능이 점차 상실되어 갔다. 또 화약과 화포의 사용이 증가하면서 성곽은 성벽이 낮아지고 옹성과 치성, 해자를 동반하는 시설물이 증가했지만, 산성은 규모가 큰 성곽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삼국 시대 이래로 사용되어 온 규모가 작은 산성들은 폐성되었다. 제천 지역의 성곽들도 대체로 동일한 양상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방어상 많은 허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천 지역은 삼국 시대에는 한강 상류의 교통로 확보와 남북으로의 진출에 사활을 걸었던 삼국의 최전선에 해당하는 경계 지역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제천 지역에는 많은 성곽이 축조되었다. 이러한 성곽을 근거로 하여 고려 시대에는 거란과 몽골,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여 커다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역사의 승전장이 되었다. 국난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천 지역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전과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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