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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654
한자 烽燧
영어음역 Bongsu
영어의미역 Beacon Fire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백종오

[정의]

조선 시대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분포한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개설]

봉수는 외적의 침입 등 변경 지역의 급박한 소식을 중앙 정부에 전하는 통신 수단으로 낮에는 횃불[烽], 밤에는 연기[燧]를 이용했다. 조선 시대 봉수는 위치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연변 봉수(沿邊 烽燧), 내지 봉수(內地 烽燧)로 나뉜다. 경봉수는 서울 목멱산 봉수를 말하고, 국경이나 해안 근처에 위치한 것을 연변 봉수, 연변 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 봉수를 내지 봉수라 하였다. 제천 지역은 부산 동래의 응봉(應峰) 다대포진(多大浦鎭)에서 출발해서 서울 목멱산으로 이어지는 제2봉수로 구간에 해당되는 내지 봉수이다.

[변천 및 운영]

봉수는 산이 많아서 교통이나 통신에 불리한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유용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봉수 제도는 삼국 시대에 이미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고, 고려 시대에 들어와 의종 3년인 1149년에 서북면병마사 조진약(曺晋若)의 건의로 봉수제를 제정하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와 더욱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봉수제가 정비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확립된 봉수 제도를 명시하였다.

그러나 봉수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여 중간에 끊어지거나 적변이 있어도 평일과 같이 1회만 올리는 일이 생기는 등, 효과적으로 국난을 대처하는 데 문제가 있어 폐지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전후로 파발제(擺撥制)를 시행하여 봉수제의 결함을 보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봉수는 파발에 비해 속도가 매우 빠르고 경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전화가 등장하는 19세기 말, 즉 1894년(고종 31)까지 운영되었다.

[제천 지역의 봉수]

제천 지역에서 확인되는 오현봉수와 단령봉수 중에서 오현봉수만이 조선 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오현봉수가 제2봉수로의 직봉 노선에 속했던 것에 비해 단령봉수의 경우 간봉 내지는 일시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이들 제천 지역의 봉수 가운데 오현봉수는 1894년 봉화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제천 지역에 남아 있는 오현봉수와 단령봉수 등은 부산 다대포진의 응봉을 출발하여 단양을 거쳐 오는 신호를 받아 충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오현봉수는 오티봉수라고도 하는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청풍의 남쪽 오현(吾峴)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단양의 소이산, 서쪽으로는 충주의 오성(梧城)과 닿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쪽으로 단양의 소이산, 서쪽으로 충주의 심항산과 연락한다.”고 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는 ‘오치봉수’라고 쓰여 있다.

오현봉수는 조선 시대 5개 노선의 봉수 중 제2봉수로의 직봉에 해당하는 내지 봉수로서, 이곳에 주둔했던 봉군(烽軍)과 관련하여 『여지도서』에 청풍에 봉수 별장(烽燧別將) 1명, 봉수 감관(烽燧監官) 5명, 봉군(烽軍) 25명, 봉군보(烽軍保) 75명이 배속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청풍의 봉수로 오현봉수 한 곳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모두 오현봉수와 관련된 인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령봉수 등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간봉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조직과 운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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