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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74
한자 金尙台
영어음역 Gim Sangtae
이칭/별칭 김상호(金尙鎬),경륙(景六),백우(白愚)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11년 9월 21일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출생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활동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묘소 충청북도 제천시 고암동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삼척(三陟). 본명은 김상호(金尙鎬), 자는 경륙(景六), 호는 백우(白愚). 아버지는 김병규(金丙奎)이다.

[활동 사항]

김상태(金尙台)[1862~1911]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한 후 영월의 옥동으로 이주하였다. 단발령 이후 이강년(李康秊)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고, 호좌의진이 북상한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좇아 3년간 가르침을 받았으며, 백두산 주변과 무송·임강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귀국하여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이강년과 서로 의지하다가 1905년(고종 42) 정운경(鄭雲慶)의 봉기에 참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순종 1)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에 즈음하여 원주 진위대가 봉기하자 그 무기를 얻고, 사군 지방[제천·청풍·단양·영춘]의 병력을 모아 이강년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이 되어 의병 전쟁에 다시 뛰어들었다.

이후 갈평·영월·죽령 전투 등에서 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해 말 복상골 전투에서 패전한 이래 급히 북으로 옮겨 간 본진과 분리되었다. 이강년이 북상한 동안 남쪽에 남았다가, 이듬해 이강년의 본진이 남하하자 연합하여 서벽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후 다시 본진과 분리되어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강년이 체포되고 나서는 호좌의진을 재건하여 1911년 여름까지 태백산·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친일 분자를 처단하고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호좌대장군, 양백대장군(兩白大將軍)으로 불렸다.

1911년 여름, 자신의 종사[비서]이었다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간 우정응 등에게 속아 순흥군 석천포[경상북도 풍기군 단산면 광암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강도 및 강도 와주범(窩主犯)’으로 8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9월 21일 대구교도소에서 순국하였다. 김상태이강년의 무덤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에 따라 제천의 두학 장치미에 묻혔다. 제천 지역 유림은 봄가을로 의사를 모시는 제사를 올렸다. 이강년의 묘소는 후에 문경 쪽으로 이장되었다.

[묘소]

묘소는 1984년 11월 제천시가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따라 조성한 고암동 순국선열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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