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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75
한자 李正奎
영어음역 Yi Jeonggyu
이칭/별칭 치심(致心),항재(恒齋),옥산(玉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호좌의진 대장 종사

[정의]

개항기 제천 출신 호좌의진의 의병.

[가계]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치심(致心), 호는 항재(恒齋)·옥산(玉山).

[활동 사항]

이정규(李正奎)[1865~1945]는 본래 소론 집안인 탓에 송시열의 학문을 대단하지 않게 보았는데, 우연히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보고 감복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주장하는 화서학파에 입문하게 되었다. 안승우(安承禹)와 만나 의기투합하였고, 장담에 출입하면서 유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장담의 선비들이 망명하여 도(道)를 이을 것인가, 의병을 일으킬 것인가, 자정(自靖)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이정규유인석을 좇아 망명의 길을 원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병론자인 안승우·서상렬(徐相烈)·이필희(李弼熙) 등이 주도하던 의진이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호좌의진이 출범하자 스승을 좇아 대장 종사로서 종군하였다. 이후 여러 의병장 사이의 갈등을 무마하고 의병의 역량을 한데 모으는데 진력하였으며, 제천 의병이 군용(軍容)을 떨치게 된 데에는 이정규의 힘이 적지 않았다. 경병(京兵)이 출병하면서 호좌의진이 곤경에 처하자 서울로 올라가 중앙의 대신 및 국왕과 접촉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의병 봉기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1896년(고종 33) 의진이 제천에서 패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자, 요동으로 스승을 찾아가 모셨다. 유인석의 뜻에 따라 공자묘(孔子廟)를 건립하고, 현지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향약(鄕約) 운동을 주도하였다. 의화단(義和團)의 난을 만나 화를 피하여 스승을 모시고 귀국한 후로는 유인석의 의병 활동이 정당함을 만천하에 공포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소의신편(昭義新編)』을 간행하는 일을 주선하였다.

1904년(고종 41) 말 유인석의 명을 받아 향약을 조직하여 일진회(一進會)의 발호를 저지하였으며, 유인석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에는 스승의 명에 따라 동지들과의 연락을 위해 서울에 머물다가 검거를 피해 요동으로 들어갔다. 1910년 요동에서 국권 피탈의 소식을 듣고 귀국한 후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 등 계몽 운동 계열의 인사들과 함께 기병을 논의하였다. 이는 의병 계열과 계몽 운동 계열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그러나 ‘105인 사건’을 계기로 동지들이 체포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자정 노선에 들어가 제천·충주 등지를 다니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장담에 세워진 자양영당(紫陽影堂)에 관계된 일을 하였다. 광복이 되자 노구를 이끌고 이강년의 창의 기록을 정리하고자 애쓰다가, 1945년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항재집(恒齋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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