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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84
한자 徐相烈
영어음역 Seo Sangryeol
이칭/별칭 경은(景殷·敬殷),경암(敬菴)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896년 7월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묘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구곡리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호좌의진 의병장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은(景殷·敬殷), 호는 경암(敬菴).

[활동 사항]

서상렬(徐相烈)[1854~1896]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한 무인 출신이다. 임오군란 후 묄렌도르프가 등용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 나아갔다가 이후 제천으로 낙향한 뒤 장담마을로 이주하여 유중교(柳重敎)에게 학문을 배웠다. 화서학파의 의리와 학문에 깊이 공감하였으며, 선전관청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은 채 강학에만 몰두하였다. 장담의 선비들 가운데 핵심 인물이었고, 유중교의 사후에는 한동안 장담 선비들의 강학을 이끌면서 스승의 문집인 『성재집(省齋集)』 발간을 추진하였다.

1895년(고종 32) 일어난 을미왜변 직후에 의병 봉기를 추진하였고, 단발령 이후에도 의병 노선을 주장하였다. 이춘영(李春永) 등이 이끄는 지평의 포군들을 기초로 형성된 의진이 제천으로 오자 장담의 선비들과 함께 합류하였고, 이필희(李弼熙)를 중심으로 의진이 재조직될 때는 군사(軍師)로 추대되었다. 단양의 장회 전투를 이필희와 함께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나, 포군들이 흩어지면서 위기에 처하여 서북쪽으로 가서 재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는 호좌의진이 출범하자 적극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영월에 남아 제천으로 진군한 호좌의진의 뒤를 엄호하였고,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점령하고 있을 때는 영남소토사(嶺南召討使)에 임명되어 영남으로 파견되었다. 예천에서 영남 일곱 고을의 의병을 모아 회맹을 추진하고 의병에 협조하지 않는 예천군수와 의성군수를 베어 타협 없는 의병 투쟁의 의지를 천명하여 영남의 민심을 크게 격동시켰다.

이후 영남의 의병들과 연대하여 태봉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의병이 훈련되지 못한 탓이었고, 영남의 여러 의병장과 호좌의진을 이간질하는 관군 쪽의 공작 때문이기도 하였다. 조령 쪽에서 일본군의 배후를 치는 작전상의 공조도 원활하지 않았다. 영남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서상렬은 예천을 거쳐 제천 쪽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은 제천을 압박하고 있었고, 결국 1896년 5월 25일 호좌의진은 오랫동안 근거지로 장악하고 있던 제천을 빼앗기게 되었다.

제천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고을을 해방구로 만들었던 수성장 체제도 무너져 내렸다. 이때 서상렬은 서북 지역에서 재기할 것을 건의하고, 유인석이 이끄는 대장진의 서행(西行)을 앞장서서 개척하였다. 7월 낭천[화천]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호좌의진에서는 을미 의병 당시 의리에 목숨을 바친 ‘육의사’ 중 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묘소]

묘소는 제천시의 구곡리 상구곡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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