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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1373
한자 舟論神學校
영어음역 Baeronsinhakgyo
영어의미역 Baeron Catholic Theological School
이칭/별칭 성요셉신학교,성요셉신학당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여진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56년연표보기
해체 시기/일시 1867년연표보기
최초 설립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지도보기
성격 학교
설립자 푸르티에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있었던 신학교.

[설립 목적]

배론신학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칙에 따라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 신부는 1836년(헌종 2) 서양인 신부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방인 사제[현지인 사제]를 양성하여 그들이 교회를 운영하도록 하기 위해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를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고 가장 짧은 시일 내에 신부를 양성하기 위해 국내에서 정하상(丁夏祥), 이재용 등 4명을 교육하였으나, 계속된 천주교 박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어 1855년(철종 6)에 마침내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의 장주기 요셉 집에 우리나라 최초로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배론신학교는 예비 신학교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856년(철종 7) 8월에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푸르티에 신부를 교장으로 임명하면서 신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설립 당시 배론신학교의 학생은 6명이었으나, 1856년 푸르티에 신부가 라틴어반을 시작할 때에는 4명으로 줄었다. 이후 배론신학교는 베르뇌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사제 양성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었다. 이어 1861년(철종 12)에는성 요셉을 신학교의 주보로 정하였다.

하지만 배론신학교는 1866년(고종 3) 병인박해로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와 장주기가 순교함으로써 개교 11년 만인 1867년에 폐교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배론신학교는 처음에 장주기가 신학교 살림을 돌보며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그를 도와 이경주 빈첸시오가 한문을 가르쳤다. 1856년 성모 승천 축일 이후에 부임한 푸르티에 신부가 한글을 배우면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한편, 1861년에는 상급반 학생들에게 수사학을 가르쳤고 1862년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부임해서 하급반 학생들을 돌보면서 철학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신학생들은 라틴어를 비롯하여 한글, 한문, 수사학, 천문학, 음악, 지리, 역사,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일반교양 과목을 배우는 한편 스콜라 철학을 비롯한 신학의 전문 지식 등 서양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블뤼 신부가 설립하여 운영하던 예비 신학교는 점차 배론신학교를 위한 예비 신학생 양성 기관으로, 1856년 이후에는 평신도 교사가 한문 과정을 가르치는 학당 형태로 변모되었다. 배론신학교의 교장은 푸르티에 신부이고, 교사로는 프티니콜라 신부와 장주기 요셉, 이경주 빈첸시오가 있었다.

신학생들은 정규 교육을 통해서 서양의 근대 문물과 철학, 신학을 배우며 사제의 꿈을 키워 왔으나, 천주교 박해로 인해 단 한 명의 사제도 탄생시키지 못한 채 배론신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배론신학교 폐교 이후 신학생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의의와 평가]

배론신학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사제 양성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신학교의 정착은 조선 교구의 사제 양성 활동이 배론과 페낭, 즉 국내외에서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두 곳 중 어느 한쪽의 교육이 중단될 경우에도 끊이지 않고 사제를 양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배론 이외의 여러 지역에 예비 신학교를 설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페낭신학교로 계속해서 신학생들을 보내는 데 어려움이 있자, 조선 교구에서는 배론신학교를 교구 소신학교로, 더 나아가서는 페낭신학교와 같이 제대로 된 교육 과정을 소화해 낼 수 있는 대신학교와 소신학교로 성장하기를 기원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1861년 4월에는 대신학교가 개설되었다.

신학교의 성격에서 본다면 첫째, 배론신학교는 예비 신학교가 아니라 한국 천주 교회 최초의 정주형 교구 신학교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배론신학교는 사제 양성을 위한 모든 교육 과정, 즉 대신학교와 소신학교를 겸비한 신학교였다. 지금의 교육 제도로 말한다면 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을 병행하였던 교육 기관인 셈이다. 셋째, 배론신학교는 교육 목적이나 교수, 학습 내용이 분명했고,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건물과 교사, 학생도 완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배론신학교는 다블뤼 주교가 맡았던 교구 소신학교와 구별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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