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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태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907
한자 夫泰煥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규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부태환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5년 3월 - 부태환 대정공립보통학교 졸업, 제주공립농업고등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13일 - 부태환 일본천황 비판 투고문 작성 투서 주동
수학 시기/일시 1928년 3월 - 부태환 제주공립농업고등학교 퇴교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부태환 자택에서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자간담회 개최, 제주도야체이카당외분자 가입, 혁우동맹 재건 도모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부태환 구좌 해녀 항일 항쟁 관련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부태환 광주지법 목포지청 3년형 선고, 대구복심법원 2년형 선고 받음
추모 시기/일시 1997년 2월 - 부태환 제주농업고등학교 명예졸업장 추서
출생지 부태환 출생지 -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2077번지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부태환 거주지 - 제주시 삼도동 991번지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제주도 야체이카 당외분자

[정의]

일제 강점기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출신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가계]

1910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2077번지에서 부달화(夫達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부태환(夫泰煥)은 1925년 3월에 대정(大靜)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진학하였다. 당시 재학 중 부태환은 최우등생이었으나 항일문(抗日文) 투고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졸업 직전인 1928년 3월에 퇴교 처분을 받았다. 항일문(抗日文) 투고 사건은 1928년 2월 12일, 부태환이 하숙을 하던 제주시 일도동 고영희(高永禧)의 방에서, 제주농업고등학교 2학년 장길수(張吉壽)·진택주(秦宅周), 3학년 김상추(金商秋) 등과 함께 일본 천황(天皇)에 대한 불경기사(不敬記事)를 작성하여 투고를 결의하였다. 이에 부태환은 “졸업하는 동지들에게”라는 제목의 천황을 비판하는 기사를 작성하여 그 다음날 이 기사를 제주 조선인 기자단이 삼도동 백경숙(白京淑)의 집에 설치해 놓은 투서함에 집어넣었다. 경찰은 3월 3일 3학년생 김상추, 부태환를 비롯한 제주청년회 집행위원 김정로(金正魯)와 윤석원(尹錫沅) 등을 소환 취조한 끝에 이 사건의 발단이 부태환임을 밝혀내었고 3월 10일 광주지법 검사국에 송치하게 되었다.

부태환은 1930년에 강국화(姜菊花)와 결혼하여 제주시 삼도동에 살았으며, 1936년 이후 한림리에서 고무신 상점을 경영하였다. 1931년 음력 정월에 그의 집에서 강창보(姜昌輔)·김민화·김순종·김한정·장종식 등과 함께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자 간담회’를 개최하고 후일 강창보에 의해 “제주 야체이카”를 조직, 그해 7월에 장종식(張鍾植)과 함께 제주도 야체이카 당외분자로 가입하게 된다.

이후 강창보를 중심으로 “혁우동맹(革友同盟)”을 재건하던 중 1932년 해녀 항일 투쟁에 배후 단체로 지목,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의 죄명으로 1933년 2월 28일에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미결구류일수 180일이 본형에 산입되어 최종 2년형을 선고받았다.

선고사유는 “공산주의자로 사유재산제도 반대, 일본제국 통치 거부하여 만인평등의 공산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혁우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야학을 통해 청소년에게 공산주의 의식을 고취시켰다.”는 것이었다.

이후 부태환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망하였으나 그 시기 및 구체적인 행적을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1997년 2월에 “항일문 투고”사건의 동지였던 김상추와 함께 제주농업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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