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1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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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 Period |
이칭/별칭 | 조선왕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범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유지되던 시기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역사.
[개설]
충청남도 아산시는 조선시대 때에 아산현(牙山縣), 신창현(新昌縣), 온양군(溫陽郡)으로 각각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모두 인접 지역이었던 만큼 행정구역 설정부터 군사제도, 교통 및 통신 등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를 통해 아산 지역의 인구 구성 비율을 알 수 있으며,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에 걸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여지도서』에서는 아산 지역에 살던 성씨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연혁 및 행정구역]
아산현은 조선시대 아주현(牙州縣)이었다가 1413년(태종 13) 아산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1459년(세조 5) 아산현 자체가 폐지되어 토지와 백성은 평택·신창·온양에 나눠 붙이고, 향리는 온양으로 분속시킨 일도 있었다. 1465년(세조 11) 아산현이 복구되면서 아산현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05년(연산군 1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관할이 변경되기도 하였으나 중종 때 다시 충청도 관할이 되었다. 아산현은 1896년(고종 33) 지방관제 개정 때 충청남도 관할이 되었고, 1913년 아산군(牙山郡)이 되었다.
신창현은 고려시대부터 신창현으로 불렸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감무가 파견되다가 1414년(태종 14) 온수현(溫水縣)과 합쳐져 온창현(溫昌縣)으로 불렸다. 그러나 2년 후 바로 나뉘어져 신창현이 되었고,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1896년 충청남도 신창군(新昌郡)이 되었다가 1914년 아산군에 통합되었다.
온양군은 고려시대 때에 온수군(溫水郡)이었다. 1414년(태종 14) 신창현과 통합되어 온창현이라고 했다가 1416년(태종 16) 분리되어 온수현(溫水縣)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 세종이 온천에 병을 치료하러 왔다가 효험이 있자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시켰다. 따라서 온양군은 관할구역이 작은 편이었지만, 군수(郡守)가 파견되었다. 1896년 충청남도 온양군이 되었다가 1914년 아산군에 병합되었다.
[군사]
조선시대 지방의 군사제도는 세조 때 정비된 진관체제(鎭管體制)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진관체제는 지휘관이 지휘하는 주진(主鎭)과 내륙 주요 거점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 여러 고을을 소속시켜 방어하는 개념이었다. 충청도의 경우 충주, 청주, 공주, 홍주에 거진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아산현·신창현·온양군은 홍주진관(洪州鎭管)에 소속되어 홍주목사의 지휘를 받았다.
[교통 및 통신]
충청남도 아산 지역은 바다와 접하는 한편, 충청 내륙과 경기도로 연결할 수 있어 일찍부터 수운과 육운이 발달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수운이 발달하였는데, 이는 아산에 공세곶창(貢稅串倉)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이후 국내외 정세가 안정되면서 해상교통의 안정성도 증가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수운을 이용하는 조운제도(漕運制度)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이용하던 기존의 조창(漕倉)이 자연적인 이유로 제 기능을 못하면서 세종 때 설치된 공세곶창에 조운이 몰렸다. 공세곶창이 있는 공세리는 아산천과 삽교천이 만나 아산만으로 나아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1478년(성종 9)부터는 공세곶창에 경기도 일부와 충청도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수납·운송하였고, 1523년(중종 8)에는 80칸의 창사(倉舍)를 짓기도 하였다. 이후 19세기 조창이 혁파될 때까지 공세곶창은 시기별로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명맥을 이어나갔다.
또한 육상교통의 핵심인 역(驛)과 원(院)이 다수 설치되어 있었다. 아산 지역이 충청우도(忠淸右道) 서부해안 지방과 내륙을 연결하고 경기도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산에는 예산과 평택을 연결하는 시흥도(時興道)의 중심 역인 시흥역(時興驛), 시흥도 소속의 창덕역(昌德驛), 장시역(長時驛)이 있었다. 원으로는 불장원(佛藏院), 요로원(要路院), 흥인원(興仁院), 명암원(鳴巖院), 용정원(龍頂院), 신계원(新禮院), 용두원(龍頭院), 대조원(大棗院) 등이 있었다. 아산의 역과 원은 역원제가 폐지되는 1896년까지 그 기능을 하였다.
아산 지역에는 원거리 통신수단인 봉수(烽燧)도 존재하였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여 수도까지 소식을 전하는 전근대 원거리 통신수단이었다. 아산에는 연암산(燕巖山)에 봉수대가 있어 남쪽의 천안군 대학산(大鶴山)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직산현 망해산(望海山)으로 전하였다. 조선의 봉수는 19세기 말 전신, 전화가 그 기능을 대체하기 전까지 원거리 군사통신으로 기능하였다.
[인구와 성씨]
『호구총수』에 기록된 18세기 아산 지역의 호(戶)는 8,712호에 남자 1만 7,965명, 여자 2만 4,014명으로 총 4만 1,979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자세히 보면 아산현이 3,955호에 남자 7,804명, 여자 1만 550명, 온양군이 2,816호에 남자 6,729명, 여자 8,774명, 신창현이 1,941호에 남자 3,432명, 여자 4,690명이다. 그러나 『호구총수』의 기록을 온전히 믿기는 어렵다.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보다 인구가 적게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고, 특히 세금의 대상이 되는 남자 인구수가 누락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호구총수』에 기록된 인구수는 아산 지역의 인구 구성 비율을 알 수 있게 한다. 즉, 아산현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고, 그 다음은 온양군, 신창현 순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세기 아산 지역에 살던 성씨에 대한 기록도 『여지도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산 지역에는 이(李), 강(康), 백(白), 전(全), 유(兪), 현(玄), 신(申), 장(蔣), 윤(尹), 임(林), 안(安), 표(表), 맹(孟), 방(方), 조(趙), 노(盧), 정(鄭), 남(南) 등의 성씨가 확인된다. 이를 세분해서 보면 아산현 지역에 이(李), 강(康), 백(白), 전(全), 유(兪), 현(玄), 신(申), 장(蔣), 윤(尹), 임(林), 안(安) 등의 성씨가 확인되고, 신창현에 표(表), 맹(孟), 방(方), 조(趙), 노(盧), 이(李) 등의 성씨, 온양군 지역에 정(鄭), 남(南), 이(李), 방(方), 강(康), 윤(尹), 맹(孟), 조(趙), 유(兪) 등의 성씨가 확인된다. 그러나 『여지도서』의 기록만으로 18세기 아산 지역에 거주하였던 성씨들을 단정할 수는 없다. 『여지도서』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아 지역의 변화 양상을 담고 있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지도서』에 누락된 성씨라도 아산 지역에 오랜 시간 거주한 성씨가 있을 수 있고,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씨일지라도 실제로 아산 지역에 거주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