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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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彭胤 |
이칭/별칭 | 중기(仲耆),희암(希菴),은와(恩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채팽윤(蔡彭胤)[1669~1731]은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으로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숙종(肅宗)[재위: 1674~1720]과 영조(英祖)[재위: 1724~1776]의 총애를 받았다.
[가계]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은와(恩窩)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채충연(蔡忠衍), 할아버지는 채진후(蔡振後), 아버지는 현감 채시상(蔡時祥)이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 권흥익(權興益)의 딸이다. 채팽윤의 부인은 초배(初配)[처음 아내]는 청주 한씨 한후상(韓後相)의 딸이고, 계배(繼配)[새로 맞이한 아내]는 기계 유씨 유명거(兪命擧)의 딸이다.
[활동 사항]
채팽윤은 1687년(숙종 13) 진사가 되고, 16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사마방목(司馬榜目)과 문과방목(文科榜目)에는 채팽윤의 거주지가 모두 충청남도 보령으로 기재되어 있다. 채팽윤의 집안이 보령에 있었던 것은 채팽윤이 남긴 시 중에 중형의 보령향장(保寧鄕庄)이란 글에서 “청명에 할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리니 만감이 든다[淸明拜王父墓志感]”는 글에 ‘보령의 진평(保寧榛坪)’이라고 붙은 주기 등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채팽윤이 보령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1692년과 1693년에 충청도 정산(定山)에 귀근(歸覲), 즉 부모를 모시러 갔던 일, 또 1696년과 1699년 이후에는 매년 한두 차례씩 홍주로 귀근하였던 사실 등을 보면 채팽윤의 근거지가 보령, 정산, 홍주 등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16년 홍주목사에 제수되었지만 자신이 사는 곳이란 이유로 사양하기도 하였고,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고향 선산인 홍주로 모셔와 장례를 지냈다. 또한, 1728년 이인좌의 난 이후에는 남산 근처에서 머물렀다. 채팽윤의 부인 청주 한씨와 기계 유씨 모두 홍주, 청양 등지의 대표적인 재지사족(在地士族)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채팽윤은 보령과 정산, 홍주, 청양 등과 모두 인연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채팽윤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고,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채팽윤이 죽은 후 인물됨을 기록한 『영조실록(英祖實錄)』의 졸기(卒記)에는 숙종 대에 채팽윤이 궐내에 노닐 때면 언제나 숙종이 보낸 내시가 뒤따라다니며 채팽윤이 읊은 시를 몰래 베껴 바로 숙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당대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1694년 정언(正言)에 있으면서 홍문록(弘文錄)[조선 시대 홍문관 관원을 선정할 때 작성하는 인선 기록]에 올랐으나, 이이(李珥)[1536~1584]·성혼(成渾)[1535~1598]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주장한 이현령(李玄齡)의 상소에 참여했다 하여 삭제되었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나 강학하며 지내다 1724년 영조의 즉위로 다시 정계에 돌아와 도승지(都承旨)·대사간(大司諫)·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 요직을 맡았으나, 감시장시관(柑試掌試官)이 되었을 때에 성균관 유생들이 전날 양현(兩賢)의 모독과 관계되었다 하여 응거(應擧)를 거부, 교체되었다. 1730년(영조 6)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해남의 두륜산(頭輪山) 대화사중창비(大花寺重創碑)와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 『희암집(希菴集)』 29권이 있고, 『소대풍요(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채팽윤은 문집에 양자인 채응동에 대하여 5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지금까지 양자에 관한 연구는 주로 역사 분야에서 진행되어 왔고, 문학 작품을 통한 연구는 거의 없었는데, 이 자료를 통해 조선 시대 양자의 한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