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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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荊山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일대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강재현 |
[정의]
757년에서 940년까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지역에 있던 행정 구역.
[개설]
형산현(荊山縣)은 통일 신라의 9주(州) 가운데 양주(良州) 관내 밀성군(密城郡)[밀양]의 5개 영현(領縣) 가운데 하나로서 757년(경덕왕 16)에서 940년(태조 23)까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일대에 설치된 현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본래 경산현(驚山縣)인데 757년에 경덕왕(景德王)의 한화 정책(漢化政策)의 일환으로 진행된 지방 제도 개편으로 고유 지명을 중국식으로 개칭되면서 형산현으로 개칭된 후 밀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경덕왕의 재위 기간은 신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새로이 부상한 귀족 세력에 의해 중대 전제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경덕왕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한화 정책을 펼쳐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의 고유 지명과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밀성군 조에 의하면 “형산현은 본래 경산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청도군에 합하여 속해 있다.[荊山縣 本驚山縣 景徳王改名 今合屬清道郡]”라고 하였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청도군 조에 의하면 “본래 이서국 땅이다. 신라 때 이서군이 되었다가 후에 대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에 오악현·형산현·소산현·이산성·가산현·오도산성을 합쳐서 청도군이 되었다.[本伊西國地也 新羅時爲伊西郡 後改爲大城郡 在高麗太祖統合三韓時 合烏岳縣(本烏也山縣) 荊山縣(本驚山縣) 蘇山縣(本率已山縣) 伊山城 茄山縣(一云 驚山城) 烏刀山城爲淸道郡]”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청도군 조에 의하면 “고려 초에 신라의 대성군과 오악·형산·소산 세 현을 합쳐서 청도군이 되고 밀성군에 내속시켰다.[淸道郡一云道州 高麗初合新羅大城郡烏岳荊山蘇山三縣爲郡 來屬]”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도군 조에 의하면 “본래 이서소국이다 … 경덕왕 때에 구도를 오악현으로 이름을 고치고, 경산은 형산현으로 고치고, 솔이산은 소산현으로 고쳐서 모두 밀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다시 세 성을 합쳐서 군으로 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는데 도주라고도 한다.[本伊西小國 … 景德王時仇刀改稱烏岳縣 驚山改荊山縣 率伊山改蘇山縣俱爲密城郡領縣 高麗初復合三城爲郡 改今名一云道州]”라고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청도 연혁 조에 의하면 “본래 이서소국으로 신라가 이를 멸하고 솔이산, 오도산, 경산 세 현을 두었고, 경덕왕 16년 세 현의 이름을 고친 후 모두 밀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23년 세 현을 합하여 청도군을 설치하였다.[本伊西小國 新羅滅之 置率伊山烏刀山驚山三縣 景德王十六年改三縣名俱爲密城郡領縣 高麗太祖二十三年合三縣置淸道郡]”라고 하였다.
또 고읍(古邑) 조에 의하면 “형산은 동남으로 7리[2.749㎞]이며, 폐성 땅이다. 본래는 가산성인데 이서국터라고도 하며 경산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 형산으로 고쳐서 밀성군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본군에 합하였다.[荊山 東南七里 吠城之地 本茄山城一云伊西國基一云驚山 景德王十六年改荊山爲密城郡領縣 高麗初合于本郡]”라고 하였다.
[내용]
757년 지방 제도 개편으로 경산현을 형산현으로 개칭한 후 밀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 후삼국 통일 전쟁이 일단락된 후 전반적인 체제 개편의 일환으로 진행된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오악·소산 두 현과 합쳐서 청도군이 신설되었다.
형산현의 위치는 『대동지지』 청도 고읍 조에 따르면 읍치의 동남쪽 약 2.749㎞[7리]에 위치한 폐성(吠城) 땅으로 이서국의 옛터[伊西國基]라고 하였고, 『대동여지도』에도 읍치의 동남쪽에 형산이 표시되어 있다. 폐성 혹은 견성(犬城)은 지금의 화양읍 소라리로 비정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형산현은 지금의 화양읍 경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김정호는 폐성을 이서국기라고 하여 이서국의 성지로 보았으나 현재 화양읍 소라리에 위치한 폐성은 둘레가 1㎞ 미만의 성지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1832년 간행된 『청도 군지』에서 이서고성을 군의 북쪽 10리[3.927㎞]에 있다고 하였고,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서는 이서면 토평리를 이서국의 고지라고 지적하였다. 현재의 토평리는 행정 구역상 화양읍 토평리에 속하며, 이곳에는 토평리 백곡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성이 있다. 그리고 백곡산성은 토성으로 주위에는 이서국의 왕성과 관련된 둔직(屯直), 근바위, 근방위(近防衛) 등의 지명이 있다. 따라서 백곡산성이 이서국의 고지이며, 종래 이서국기로 전하는 폐성은 이서국의 왕성을 지키는 전초 기지 또는 군사 요충지였다고 추정된다. 이렇게 본다면 형산현은 이 일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변천]
삼국 시대에는 경산성 또는 가산성으로 불렸다. 757년 지방 제도 개편으로 형산현으로 개칭된 후 밀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이후 940년 소산현, 오악현과 합쳐서 청도군이 되었다. 청도군이 신설된 것은 후삼국 통일 전쟁 중 이 지역 호족 세력의 향배나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 시대에도 신라가 건천을 넘어 청도-창녕-밀양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로서 낙동강 중류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확보해야 할 요충지였으며 통일 후에도 밀양 지역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리하여 고려 초에 주변 군소 군현을 병합하여 하나의 군으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