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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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風水 |
영어음역 | Pungsu |
영어의미역 | Fengsui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집필자 | 김영진 |
[정의]
땅의 기운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는 믿음과 행위.
[개설]
풍수는 크게 죽은 사람이 묻힐 묘자리를 보는 음택풍수(陰宅風水)와 살아있는 사람이 살 땅을 보는 양택풍수(陽宅風水)로 나누고, 양택풍수는 다시 집터를 보는 주택풍수와 왕도나 고을 터를 보는 도읍풍수로 나눈다. 그러나 음택풍수나 양택풍수가 모두 땅기운이 좋은 곳에 조상을 묻거나 살 집을 지어 복을 받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풍수는 기본적으로 좋은 땅, 즉 명당(明堂)을 찾는 것이다.
양택풍수의 경우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擇里志)』에서 산수와 더불어 생활의 편리와 이웃의 인심을 중요조건으로 제시하였듯이 양택신앙이 약화되어 청주에서는 대체로 남향집에 동쪽으로 대문을 두면 좋은 집이라 하였고, 지금은 시장이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고 특히 학군이 좋은 곳에 집을 마련하려고 하는 정도다. 최근에는 수맥(水脈)이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킨다고 하여 집을 지을 때 수맥을 피하려고 풍수를 이용한다.
그러나 음택풍수는 아직도 그 신앙이 깊어 오늘날 풍수라면 명당에 묘를 쓰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명당자리는 지관(地官) 또는 지사(地師)로 불리는 풍수이론가가 정확한 방위를 볼 수 있는 속칭 ‘쇠’라는 패철(佩鐵)을 가지고 직접 산을 답사하면서 조산(祖山)과 지세를 보는 간룡(看龍), 주위의 지형을 보는 장풍(藏風), 물의 흐름을 보는 득수(得水), 중심적 지혈을 찾는 점혈(占穴), 방향을 보는 좌향(坐向)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고려하여 결정해 주고 사례비를 받는다.
그리고 풍수적 결함이 있으면 나무를 심거나 둑을 쌓아 인위적으로 보충하는 비보(裨補)를 하거나 연못을 파거나 돌을 묻어 땅의 기운을 누르는 압승(壓勝)을 하였다.
명당은 그 형국에 따라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이니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니 하는 여러 가지의 이름이 붙여지고 그 이름에 따라 감응이 다르며 또 같은 명당이라도 사람의 관계에 따라서 즉시발복, 당대발복, 후대발복으로 감응이 다르다고 하는데 감응의 사례는 민간에 많은 풍수설화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명당이라면 남의 땅을 빼앗거나 차지하는 분쟁으로 많은 산송(山訟)이 있었고 심지어 권력으로 승려를 내쫓고 절을 헐고 조상의 무덤을 쓰면서 영화와 출세를 도모하였으며 그래도 감응이 없으면 다른 명당을 찾아 무덤을 옮기는 이장(移葬)이 있었는데 이런 이장은 지금도 자주 볼 수 있다.
[명칭유래]
풍수라는 말은 청조자(靑鳥子)의 『장경(藏經)』에 “산천의 기운이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그친다. 그리하여 ‘풍수’라 하는데 풍수의 법은 득수(得水)가 으뜸이오 장풍(藏風)이 다음이다.”라고 한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준말로 일명 감여(堪輿)·지리(地理)·지술(地術)·풍수지리(風水地理)라고 한다.
[변천]
풍수는 고대 중국의 자연신앙에서 분화된 산악숭배에서 형성된 신앙으로 한(漢)나라 때 청조자의 『장경(藏經)』(일명『청조경(靑鳥經)』)에서 정리되고 동진(東晋) 때 곽박(郭璞)의 『장경(藏經)』(일명『금낭경(錦囊經)』)에서 체계화되었다. 후대에 음양설(陰陽說)과 도참설(圖讖說)이 추가되고 다시 도교사상이 가미되어 당(唐)나라 때부터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에서 형성되고 발달한 풍수설은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불교와 더불어 전래되어 주로 승려들에 의하여 보급되었는데, 신라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라고 전해진다.
고려와와 조선은 풍수설을 크게 신봉하여 왕도(王都)를 정하거나 궁궐이나 왕릉, 심지어 태실(胎室)을 조성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풍수에 근거를 두었다. 그 영향을 받아 민간에서도 풍수가 크게 보급되었으며 많은 술사(術士)들이 지은 풍수서(風水書)와 명당도(明堂圖)가 전하고 있다.
이 풍수설은 다른 민속과 달리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전승되고 신봉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주의 풍수]
청주는 땅이 기름지고 서울에 가까워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주택과 농지를 마련하여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는데, 특히 지형이 행주형(行舟形) 즉 배가 가는 형국이라고 해서 일명 ‘주성(舟城)’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청주 남문로 2가 옛 용두사(龍頭寺) 절터에 남아있는 철당간(鐵幢竿)이 청주를 처음 설치할 때 지술가(地術家)의 말에 따라 ‘배가 가는 형국’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고, 청주시청 건물도 주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배 모양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주의 지세는 남쪽이 막히고 북쪽이 트여 무심천(無心川)이 북쪽으로 흐르는 역수(逆水)라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청주의 풍수적 결함으로 읍기(邑基)가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금의 수곡동에 남숲을 조성하고, 운천동에 북숲 일명 봉림(鳳林)을 조성하여 비보(裨補)하였다.
조선의 실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청주의 지세가 동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항상 죽음의 기운이 있다. 청주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두었는데 무신년(戊申年)에 이르러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 밤에 청주성을 습격하여 당시의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1676~1728]과 영장(營長) 남연년(南延年)을 죽이고 드디어 청주성을 근거로 반역하였다.”고 하여 1728년(영조 4) 청주에서 일어난 이인좌의 반란을 청주의 풍수, 즉 무심천(無心川)의 역수에서 그 요인을 찾았다. 이인좌의 반란은 당시의 고질적인 당쟁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풍수의 탓으로 돌린 것은 조선시대 풍수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한편 청주의 진산(鎭山)인 당이산(唐羡山)은 오늘날 흔히 ‘우암산(牛岩山)[338m]’으로 부르고 있지만, 옛날에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와우산(臥牛山)’이라 불렀는데 일설에는 청주대학교 박물관 앞의 작은 연못이 소의 먹이를 담는 구유의 자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