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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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再祐[東區] |
영어공식명칭 | Kwak Jaeu |
이칭/별칭 | 계수(季綏),망우당(忘憂堂),충익(忠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있는 망우당공원에서 기리고 있는 조선후기 임진왜란 의병장.
[개설]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낙동강의 요해처(要害處)[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를 방어함으로써 전쟁 초기 패퇴 일색이던 전세를 반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곽재우는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공훈을 내세워 권세에 영합하거나 출세 영달을 위한 행위를 일절 하지 않았으며, 남명 조식의 외손서(外孫壻)[외손녀의 남편]이면서도 당시 치열했던 당쟁에 초연하여 어느 한쪽에도 편향되지 않았다.
[가계]
곽재우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고려 시대 금오위 교위(金吾衛校尉)를 지낸 곽자의(郭子儀)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곽승화(郭承華)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곽위(郭瑋), 할아버지는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강응두(姜應斗)의 딸이다. 배우자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김행(金行)의 딸이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녀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곽형(郭瀅)과 곽활(郭活)이고, 딸은 신응(辛膺)과 성이도(成以道)에게 각각 시집갔다.
[활동 사항]
곽재우는 1552년(명종 7) 8월 28일에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계부(季父)[막내 삼촌]에게서 『춘추』를 배웠고, 15세 때 자굴산 보리사로 들어가서 제자백가를 익혔다. 18세 때 의령 세간리에 집을 짓고 살면서 학문을 닦는 중에도 그 여가에 병법에 관한 책을 두루 읽어 통달하였다. 1585년(선조 28) 34세 나이로 별시 정시에 급제했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파방(罷榜)[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하던 일]되자 그 뒤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대패하자, 4월 22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이듬해 1592년 12월 성주 목사에 임명되어 삼가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에서 성지 수축에 열중하였다. 1595년(선조 28) 진주 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로 돌아왔다. 1597년(선조 30)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역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자 1597년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 뒤 계모 허씨(許氏)가 세상을 떠나자 성을 나와 장례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지금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가서 삼년상을 치렀다. 1599년(선조 32) 경상우도 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이라는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1599년 9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이 되어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인 1600년(선조 33)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이 일로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지금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귀양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귀양에서 풀려난 뒤 현풍에 있는 비슬산(琵瑟山)으로 들어가서 곡기를 끊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의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지어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수축하였다. 이어 선산 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찰리사의 벼슬마저 사퇴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부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 논의를 배척하는 데에 힘을 다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학문과 저술]
곽재우는 2권 1책 목판본의 『망우집(忘憂集)』이 있다.
[묘소]
곽재우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182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곽재우를 추모하며 1618년(광해군 10)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다. 1674년(현종 15)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고, 1677년(숙종 3)에 예연서원(禮淵書院)으로 사액되었다.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51년(영종 27)에 예연서원 앞에 신도비를 세웠다. 한편, 1972년 4월 22일에는 곽재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망우당공원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