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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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嶺南明德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시용 |
설립 시기/일시 | 1932년 10월 1일 - 영남명덕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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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영남명덕회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로[경상북도 도청] |
성격 | 관변단체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경상북도 지역에서 결성된 친일 유림 단체.
[개설]
영남명덕회(嶺南明德會)는 친일 유림 단체인 경북유도진흥회(慶北儒道振興會)[구 유도진흥회 경북지부]를 확대 개편하여 만든 단체로 경상북도 도민이면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총재는 도지사가, 부회장 2명 중 1명은 도 참여관(參與官)이, 각 지부의 지부장은 부윤(府尹)·군수(郡守)·도사(島司)가 맡았다. 영남명덕회는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수립하여 추진한 식민지 관제 운동인 농촌진흥운동과 조선인들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하여 조선총독부가 입안한 정신 계몽운동인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 등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뒷받침하고 침략전쟁 협력을 선전하는 활동을 하였다.
[설립 목적]
영남명덕회는 유도(儒道)의 진흥만이 아닌 사회 교화, 정신 작흥, 산업 장려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았으며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를 선전, 지원하였다.
[변천]
1932년 10월 1일 경상북도 각 군 유림 대표들과 도감, 부윤, 군수 및 경북유도진흥회 임원 등이 경상북도청 회의실에 모여 단체 이름과 회원 자격, 간부 선출안, 활동 목표 등을 협의하였다. 협의 결과 경북유도진흥회의 명칭을 영남명덕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영남명덕회는 1932년 10월 29일 제1회 역원회(役員會)를 개최하였고 이어 1939년 11월 4일 임시 역원회를 열어 새로 생긴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영남명덕회의 회장과 부회장 등 주요 인사들은 1939년 11월 29일 결성된 경북유도연합회(慶北儒道聯合會)에 참여하여 핵심 직책을 맡았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남명덕회의 총재는 경상북도 도지사가 맡았다. 설립 당시 회장은 김하용(金夏容), 부회장은 김시권(金時權)과 이선호(李宣鎬)였다. 더불어 이사, 간사, 고문을 두었는데 송문헌(宋文憲), 김재환(金在煥), 신현구(申鉉求), 서병주(徐炳柱), 장직상(張稷相), 박중양(朴重陽), 서병조(徐丙朝), 이상호(李尙鎬) 등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명망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영남명덕회는 경상북도 각 부(府), 군(郡), 도(島)에는 지부를 두었다. 지부의 지부장은 각각 부윤·군수·도사가 맡았고, 부지부장과 평의원은 지역 유력 인사로 선임하였다.
1933년 4월 14일 영남명덕회 선산지부 발회식에서 밝힌 사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풍 작흥과 생활개선에 관한 사업, 둘째, 산업 개선 발달에 관한 활동, 셋째, 지방 개량·교화 단체·육영사업의 장려 원조, 넷째, 교화에 관한 강연회·강습회 등의 개최와 조사 연구, 다섯째, 효자·절부 기타 독행자의 선장(選獎), 여섯째, 교화 인쇄물 간행 및 배부 등이었다.
영남명덕회는 1935년 초 경상북도와 협력하여 『농촌독본(農村讀本)』을 간행하였고, 1935년 3월 도내 성적이 우수한 교화 단체 43개소에 장려금을 특별 교부하였다. 1936년에는 사회교화사업과 농촌진흥운동에 공헌한 인물 11명을 선발하여 ‘유림시찰단’을 조직하고 선진 지역을 시찰하게 하였다. 1937년 3월 27일에는 경상북도청 회의실에서 열린 총회에서 국민도덕 앙양에 관한 결의를 하였고 심전개발운동과 농촌진흥운동에 전력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 당시 총재는 경상북도 도지사 고타키 모토이[上瀧基]였고, 회장은 이상호였다.
[의의와 평가]
영남명덕회는 대구·경상북도 지역에서 조선총독부가 전개한 관제 농민운동인 농촌진흥운동과 정신 계몽운동인 심전개발운동을 선전, 지원하는 등 황국신민화 정책에 앞장선 친일 관변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