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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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寄謝徐樂齋行甫 |
영어공식명칭 | Kisa Seo Nakjae Haengbo |
이칭/별칭 | 「서사원에게 사례하여 보내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79-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기사서낙재행보」 저자 손처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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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99년 - 「기사서낙재행보」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기사서낙재행보」 저자 손처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모당집』에 「기사서낙재행보」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 |
성격 | 한시|오언율시 |
작가 | 손처눌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서 강학 활동과 의병 활동을 한 손처눌이 1599년 서사원에게 지어 준 한시.
[개설]
「기사서낙재행보(寄謝徐樂齋行甫)」를 지은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이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며,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서사원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기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 곽재겸, 손처눌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구성]
「기사서낙재행보」는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내용]
일작귀래부(一作歸來賦)[한번 귀거래사를 짓고 난 후에]
신한업시전(身閒業始專)[몸이 한가로워 학업에 전념하네]
안빈궁역락(安貧竆亦樂)[가난에 편안하여 곤궁마저 즐기며]
애우회다전(愛友誨多鐫)[벗을 사랑하여 가르침 많이 받네]
자괴행미원(自愧行迷遠)[헤매는 길 아득하여 혼자 부끄럽고]
상차촉사건(常嗟觸事愆)[하는 일마다 허물 지어 항상 탄식하네]
성여부취한(誠如扶醉漢)[정말로 취한 사내 부축하는 듯하니]
구저도나변(救這倒那邊)[이쪽 잡아 주면 저쪽으로 고꾸라지네]
[특징]
「기사서낙재행보」는 선(先)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오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전란이 나라를 황폐하게 하였지만 강학 활동은 쉼이 있으면 안 되기에 손처눌이 서사원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며 대구 문풍(文風) 진흥을 위하여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