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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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夫仁洞洞約 公田碑 |
영어공식명칭 | Buindong self-governing rules memorial ston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건립 시기/일시 | 1765년 - 부인동동약공전비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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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2000년 7월 - 부인동동약공전비재건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802년 - 부인동동약공전비중수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705년 - 부인동동약공전비최흥원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86년 - 부인동동약공전비최흥원 사망 |
현 소재지 | 부인동동약공전비 -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 323[용수동 665-2] |
성격 | 기념비 |
관련 인물 | 최흥원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부인동 일대에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흥원이 동약을 실시한 것을 기념해 세운 공전비.
[건립 경위]
최흥원(崔興遠)[1705~1786]이 1765년(영조 41) 61세 때 동약[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자치규약]을 실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전비문을 친히 지어 부인동에 공전비를 세웠다. 1802년(순조 2) 홍수로 무너진 공전비(公田碑) 중수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한차례 중수를 거쳤다. 그렇지만 1930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그 후 70년 후인 2000년 7월에 농연서당 밖에 재건하였다.
[위치]
부인동동약공전비는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있는 농연서당(聾淵書堂) 밖에 있다.
[금석문]
「부인동동약공전비(夫仁洞洞約公田碑)」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암 최동집 공이 농연(聾淵)에 은거하시면서 민속을 규검하여 남은 풍속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쇠퇴하지 않았다. 동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위하여 옛 규약을 닦고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규약을 세워서 관부(官府)에 알리고 해마다 한 번씩 모여서 강론하여 사람들이 모두 애친(愛親)하고 충군(忠君)하는 병이(秉彝)가 있는 것을 밝혔으나, 돌아보건대 스스로 닦은 실적이 없고 먼저 부유하게 할 제도가 없으니 민속을 변화시키는 것을 대개 쉽게 논의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달성지방은 목화재배에 알맞은 땅이라 간주하여 세역을 모두 목화로 내게 하였는데, 부인동은 수전(水田)으로 땅이 목화에 알맞지 않아 풍년이 들어도 최곤(催困)함을 면하지 못하여 기한(飢寒)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약중(約中)에서 요부(饒富)한 자와 약속하여 공세를 먼저 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도모하여, 동전(洞田) 1단(段)을 팔아 수천 전(錢)을 받고 또 강회에 쓰고 남는 것을 별도로 저축하여 해마다 늘였다가 이자를 떼어서 토지를 사기로 하여 수십 년에 이르니 사들인 수전(水田)이 백여 두락에 가깝고 저축한 곡식도 수백 곡에 가까웠다. 그 밭을 공전(公田)이라 하고 창고를 공고(公庫)라 하여, 바로 이것으로써 약중(約中) 민부(民夫)의 세역에 충당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은 거의 정전제(井田制) 중에서 백 묘를 취하여 공전으로 삼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마침내 게을러지는 것이 걱정이 되고 아름다운 자취가 쉽게 사라질까 두려워서, 드디어 강사(講舍) 아래에다 큰 돌을 세우고 그 석면(石面)에 사실대로 새겨서 영구히 남기를 도모한다.
[현황]
부인동의 최씨·오씨·구씨·김씨·배씨 등 다섯 성씨는 음력 3월 한데 모여 부인동 향약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인동동약은 단순히 향약만을 실시한 것이 아니라, 선공고(先公庫)[세금을 내는 창고]와 휼빈고(卹貧庫)[백성을 구휼하는 창고]를 함께 설치하여 농민들의 삶을 안정시킨 바탕 위에 향약을 실시하였다. 부인동동약공전비는 선공고와 휼빈고의 바탕이 된 공전(公田) 운영의 의의와 방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