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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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遊錄 |
영어공식명칭 | Travel notes to the South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11년 - 「남유록」이상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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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81년 - 「남유록」이상정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48년 - 「남유록」저술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02년 - 「남유록」간행 |
배경 지역 | 「남유록」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
성격 | 잡기문 |
작가 | 이상정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이상정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은거하고 있던 최흥원을 방문하여 함께 팔공산을 유람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 유록.
[개설]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1740년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흥원은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해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을 세워 강학(講學)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했다. 또한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안정되도록 했다. 최흥원이 죽은 뒤 1789년 효행으로 정문(旌門)[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세워졌고, 1790년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구성]
「남유록」은 글의 서두에 팔공산(八公山)을 유람하고 싶었던 이상정의 평소 생각을 드러내며 글을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부인사(夫仁寺), 동화사(桐華寺), 동화사의 부속 암자를 방문하는 과정과 방문하면서 느낀 소회(所懷)를 글 속에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유록」을 짓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내용]
팔공산은 영남의 명물이며 기괴하고 절묘한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평소에 팔공산을 한번 유람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다. 때마침 일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팔공산을 유람할 기회가 생겨 팔공산 옻골에 살고 있는 최흥원의 집을 방문하였다. 최흥원의 집을 방문하여 며칠 머물면서 고금의 일을 말하면서 명리(名理)를 분석하였다. 팔공산을 유람하기 직전에는 최흥원의 초대로 조선적(曺善迪)[1697~1756]과 만나 군자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적과 이별한 뒤에 최흥원과 함께 짐을 꾸려 팔공산 유람을 떠났다. 첫날은 부인사로 향하여 주변 승경(勝景)을 관람하고 저녁에는 최흥원과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다음 날 농연(聾淵)을 지나 동화사로 향했다. 동화사의 내부와 주변 경치를 두루 살펴보니 팔공산의 으뜸이라 할 만하였다. 다음 날 동화사의 부속 암자인 염불암(念佛庵), 내원암(內院庵), 부도암(浮屠庵)을 거쳐 내려와 팔공산 유람을 마무리하였다.
[특징]
「남유록」은 단순 유람의 과정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거치는 장소마다 내력과 느낀 소회를 기술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유록」은 유람 중에도 드러나는 이상정의 도학자적인 면모와 학문적 태도를 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