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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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理事聽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06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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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09년 6월 - 대구이사청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서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1가 2-1로 이전 |
해체 시기/일시 | 1910년![]() |
최초 설립지 | 선화당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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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변경 이력 | 대구이사청 -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로 88[동인동1가 2-1]![]() |
성격 | 식민통치기관 |
설립자 | 통감부 |
개항기 대구광역시에 설치된 통감부 소속 지방 통치 기관.
대구이사청(大邱理事聽)은 1906년 대구부 동상면 포정동의 경상북도관찰부(慶尙北道觀察府) 내 선화당(宣化堂)에 설치된 통감부(統監府)의 지방통치 기관이다.
대구이사청은 1906년 8월 대구이사청 설치가 확정되면서 1906년 12월에 세워진 지방통치 기관으로서, 통감(統監)의 지시를 받아 대한제국의 지방 행정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구이사청은 1906년 12월 경상북도관찰부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에서 개청식을 열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1909년 6월 대구이사청은 지금의 중구 동인동1가 대구광역시의회 자리로 이전하였다. 대구이사청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이후 폐지되었다.
대구이사청이 설치되기 전 대구부는 부산이사청(釜山理事聽)의 영역에 속하였다. 대구이사청의 이사관은 통감의 명령 없이 대구 주둔 일본군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기에 대구 주둔 일본군과 협력하여 경상북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던 의병 항쟁을 탄압하였다. 대구이사청은 벌금이나 과태료, 구금 등에서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어 일제의 지방 통치 근간이 되었다. 대구이사청은 대구읍성(大邱邑城)의 철거, 경상감영(慶尙監營)의 장악 및 훼손, 일본인의 대구 침투와 장악의 배경이 되었다. 대구읍성의 철거와 관련하여서 대구일본인거류민단(大邱日本人居留民團)은 대구이사청 오카모토 리헤이[岡本利平] 부이사관을 앞세워 부역 인부를 고용하여 성벽 철거에 나섰다.
대구이사청은 1906년 12월에 설치된 이래 부산이사청에서 벗어나 독자적 지방 통치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대구이사청은 대구 지역에 대한 대한제국의 지방 통치를 무력화하고,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