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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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益武 |
영어공식명칭 | Choi Ikmu |
이칭/별칭 | 최익무(崔翼武)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5월 6일 - 최익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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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최익무 대구에서 독립운동 문건 배포 등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2월 4일 - 최익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 확정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8월 5일 - 최익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최익무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최익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봉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최익무(崔益武)[1875~1932]는 1875년 5월 6일 경상북도 대구 봉산(鳳山) 83에서 태어났으며 1932년 8월 5일 사망하였다. 이명은 최익무(崔翼武)이다.
[활동 사항]
최익무는 1919년 12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강태동(姜泰東)·이정래(李丁來)로부터 대한청년단 명의의 「적의 관공리(官公吏)인 동포에게」와 「남녀 학생에게[포고 제1호]」,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명의의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포고 제2호]」, 「독립축하가」라는 항일 문건을 전달받았다. 이후 등사판으로 수백 매의 문건을 찍어내서 서상하(徐相夏)·이종선(李鍾善) 등과 함께 대구 시내 각 학교와 상점 등에 뿌려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한민보(大韓民報)』 수백 매와 이범교(李範敎)에게서 전달받은 격문 등을 평안도·전라도·경상도 등지에 배포할 것을 준비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최익무는 1920년 12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32년 8월 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익무의 공적을 기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