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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항쟁[동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340
한자 十月抗爭[東區]
영어공식명칭 The Event of October
이칭/별칭 시월인민항쟁,10월 인민항쟁,10월 항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0월 1일연표보기 - 10월항쟁 발생
성격 사회운동

[정의]

1946년 10월 미군정의 양곡 배급 정책의 실패에 맞서기 위해 대구광역시에서 시작된 사건이 대구광역시 동구를 비롯해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 등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사건.

[역사적 배경]

10월항쟁은 1946년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이른바 8월 테제]에 따른 9월 총파업이 전개되는 가운데 1946년 10월 1일 대구시[지금 대구광역시]에서 촉발되었다. 대구의 항쟁은 빠르게 달성군에 파급되어 10월 3일부터 달성군에서도 발생하기 시작하여 1946년 10월 20일 전후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10월항쟁은 지도부의 통제력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확산되어 간 특징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종식과 함께 청산되어야 할 친일파 처리 문제 등 당면 문제가 미군정으로 말미암아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대중들을 압박해 오자 그것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항쟁이 촉발되었다. 특히, 농촌에서는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수집령」에 대한 강한 반발과 저항이 항쟁의 분위기를 축적하고 있었다.

[경과]

1946년 10월 3일 두 시 무렵 미군장교의 보고에 따르면, 대구 외곽의 철도에서 사보타지[노동 쟁의의 수단]를 벌이던 20명이 철도 수레에 실려 온다는 사항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은 미군에 의해 치명적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달성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뿌려졌다.

“봐라! 남쪽지방의 인민들은 총과 칼로 완전 무장하였다. 이제 우리의 청년애국자들은 재식민지화의 위험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봉기했다. 그들의 목적은 이 땅에서 우리의 진정한 애국자들을 탄압하는 악질경찰과 과중한 미곡수집량을 강요하는 악질관리,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친일반역자들을 제거하고자 함이다.”[백천에 뿌려진 팜플렛 중에서]

이 삐라에서 보듯 10월항쟁은 개혁되지 않는 경찰, 미곡수집에 대한 불만, 친일반역자의 준동 등이 원인이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라 대구경찰서 관내 동촌지서[대구광역시 동구에 있음]가 동촌 민중들에 의해 점거되었고, 그 밖의 5개 지서도 군중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또 달성경찰서 관내에서는 군중들에 의해 9개 지서 중 8개 지서, 5개 파출소를 중 3개가 점거되었다.

[결과]

대구광역시 동구의 10월항쟁은 시월 중순을 경과하면서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현 대구광역시 동구가 포함된 달성군내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여의치 않다. 다만, 집계된 경찰의 피해를 보면, 달성경찰서 소속 사망 경찰관 6명, 중상 경찰관 17명, 서원 사택 파괴 107호, 총피해액 약 1,500만 원으로 집계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광역시 동구의 10월항쟁은 해방 공간에서 전국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항쟁이었다. 해방과 함께 변화되어야 할 식민지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가 미군정에 의해 유지 혹은 재생산되는 것에 반대한 대중들의 항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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