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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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舞亭 |
영어공식명칭 | Bongmuj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봉무정」최상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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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49년 - 「봉무정」최상룡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봉무정」간행 |
배경 지역 | 「봉무정」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한시|근체시|칠언율시 |
작가 | 최상룡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최상룡이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봉무정에서 한가로운 정취를 읊조린 한시.
[개설]
최상룡(崔象龍)[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봉무정(鳳舞亭)」은 8행으로 이루어진 칠언율시로, 최상룡의 문집 『봉촌선생문집(鳳村先生文集)』 1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봉무정」의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봉정신축금호간(鳳亭新築錦湖干)[봉무정을 금호에 새로 만들어]/수분유거사사안(隨分幽居事事安)[분수를 따라 은거하니 일마다 편안하네]/
수야춘풍관가색(藪野春風觀稼穡)[수야의 봄바람은 농사를 주관하고]/독암청일회의관(獨巖晴日會衣冠)[독암의 맑은 빛은 의관 차린 손님 다 모았네]/
택인행유현규동(擇仁幸有賢規洞)[인을 택한 자들은 현규동에 있고]/습례단의대수단(習禮端宜大樹壇)[예를 익힌 자들은 대수단에 마땅하네]/
총죽고동현송지(叢竹孤桐弦誦地)[대나무 오동나무가 무성한 현송의 땅에]/분명령물차중간(分明靈物此中看)[분명 신령스러움을 이 안에서 보리라]
[특징]
「봉무정」은 1·2·4·6·8구(句)에 한(寒)계열의 운자를 두었다.
[의의와 평가]
「봉무정」은 봉무정에서 맞이하는 자연의 정취를 수련과 함련에서 느낄 수 있고, 경련과 미련에서는 봉무정을 건립한 의도와 풍속의 교화에 힘썼던 최상룡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