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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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翼熙 |
이칭/별칭 | 여구(如耉),해공(海公),해후(海候),왕해공(王海公),왕방평(王邦平),왕방우(王邦牛)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우용 |
[정의]
경기도 광주 출생의 독립 운동가, 정치가.
[가계]
신익희(申翼熙)의 본관은 평산, 자(字)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 해후(海候), 중국에 체류 중에는 왕방평(王邦平), 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牛) 등의 별명을 사용하였다. 장례원경을 지낸 신단(申檀)과 그의 넷째 부인 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단은 7남 1녀를 두었는데 신익희는 그의 여섯 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었다.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에서 살았으며 1956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신익희는 1905년~1908년에 광주 남한산성 소학교, 1908년에서 1910년까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공부하고, 1911년 일본 세이소쿠 영어학교 고등 수험과, 1913년~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1914년~1915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다녔다. 1913년 경기도 광주에 동명강습소를 개설하였고, 1917년에는 중동학교 교사와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부터 독립 운동에 관여하였으며, 3.1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수배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 대리 등을 지냈다. 1920년에는 임시 정부 내무총장 대리, 외무총장 대리, 국무원 비서장을 지내다가 임시 정부와 창조파, 개조파의 갈등으로 약화한 뒤, 한편으로는 중국 군벌 및 정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1929년 한국혁명당을 창당하고 1920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1934년에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1935년에 민족 혁명당에 합류하였으며, 1937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 1938년에는 조선청년전위동맹에 합류하였고, 1941년에 한중문화협회 상무 위원을 지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임시 정부에 복귀하였다가 1944년 임시 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귀국 후에는 김구(金九) 등 임시 정부 중심 세력과 갈라져 이승만과 노선을 같이 하였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위원장, 자유신문사(自由新聞社) 사장, 국민대학교(國民大學校) 초대 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이던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자 의장에 피선되었다. 1949년 한민당의 김성수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 의장에 피선되었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民主黨)으로 개편하여 대표 최고 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지방 유세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묘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