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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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泉郡農會 |
영어음역 | Gimcheongun Nonghoe |
영어의미역 | Gimcheon-gun Agricultural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있었던 조선농회 소속 단체.
[설립 목적]
김천군 농회는 조선농회령에 따라 1926년 4월 22일 군 농회로 조직되었다. 조선농회령은 조선총독부가 각종 농업 단체를 정리·통합하기 위해 1926년 1월 법령으로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계통농회가 만들어졌으며 겉으로는 농업의 개량과 근대화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농업 정책 대행 기구로서 기능하였다. 즉 일제 행정 관청의 별동대로 설치되어 각종 농업 단체를 법제화·제도화하여 그 기능을 일층 강화·확대함으로써 소작 농민의 착취를 극대화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주적 이익을 꾀하는 단체였다.
[변천]
김천군 농회가 설립되기 이전이었던 1912년 2월 김천의 농업 관련 기구로 경상북도 실업연구회의 지부가 김산군(金山郡)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산업 장려를 위한 기관으로 출발한 김산지부(金山支部)는 지극히 소규모인데다 소극적 활동을 보였다. 1914년 3월에 김산군이 폐지됨에 따라 경상북도실업연구회 김천지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상북도실업연구회 김천지부는 1917년에 이르러 회원 1만 7800명을 둔 지역의 거대 단체가 되었다. 김천지부는 군수가 지부장이 되고 기수 1명을 두었으나 1918년 3월 경상북도 실업연구회가 해산됨에 따라 함께 해산되었다. 이에 김천지부의 사업은 지주조합, 승입생산조합, 잠업조합, 면작조합 등 각 조합별로 흩어지게 되었다.
1920년에는 농회가 조직됨에 따라 농업 관련 단체들이 김천군 농회로 통합되었으며 당시 사업은 농사의 개량 및 발달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2년 들어서는 일반적인 농사 외에도 임업과 채종 관련 사업의 경영도 함께 하였다. 그러나 조선농회령의 공포에 따라 계통농회 체제의 형성과 더불어 1926년 4월 22일에 설립된 김천군 농회는 군(郡)의 주도 아래 각 읍면장과 지역의 지주들을 회원으로 하여 운영되는 농업 정책의 담당 기구였다. 여기서는 29명의 회원이 참여하여 회칙, 수지 예산 사업 계획, 잠업 증진 계획 등을 통과시키고 납세 성적 우량 구역을 선정하여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선정된 우량 구역은 김천군의 아천면, 아포면 대성동, 개령면 광천동 등이었다.
또한 김천군 농회는 1927년 3월 1일에 군회의실에서 평의회를 개최하여 1928년도 경비의 수입·지출 예산과 분부(分賦) 수입, 평의원 보궐 선거, 급여와 여비 규정 일부 개정, 구 농회 인계 채권 정리, 구 농회 기부금 정리 등에 관한 건을 처리하였다.
이후 1939년 무렵에는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농사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모판이 고사 직전이었고 다른 곡물도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식수도 고갈되어 심각한 물난리를 겪고 있었다. 이에 김천군 농회는 같은 해 6월 15일 부곡동 고성(姑城)에서 군내 16읍면장이 참여하여 기우제를 열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