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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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泉二六會 |
영어음역 | Gimcheon Iyukhoe |
영어의미역 | Gimcheon 26th Day Societ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 거주 일본인들의 친목 단체.
[설립 목적]
김천 이육회(金泉二六會)는 1924년 1월에 김천 지역 거주 일본인들이 일본인 사회의 이해관계 증진을 위해 결성한 친목 단체이다. 김천은 경부선 철도 공사를 계기로 식민지 도시로 성장한 곳이었다. 따라서 당시 김천은 성장과 더불어 도시 개발에 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의 확충이 반드시 요구되는 상황이었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 사업자 간에 치열한 경쟁과 반목이 발생하였다. 이에 일본인 사업자들 간의 원만한 관계 형성을 위해 친목 단체로서 김천이육회가 결성되었다.
[변천]
김천에 일본인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1904년 무렵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가 진행 중 일 때였다. 당시 아라이[荒井初太郞]가 운영하던 황정조(荒井組)가 김천 일대 철도 공사의 청부를 맡았다. 황정조(荒井組)는 업무상 감천 강 언덕에 자리한 시장 안에 사무소를 열고 주임인 시라이[白井庄二]를 비롯한 직원들을 상주시켰다. 이것이 김천에 일본인이 거주하게 된 효시였다.
황정조(荒井組)의 경영주 아라이[荒井初太郞]는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마쓰모토 가쓰다로[松本勝太郞]와 함께 토목계의 삼태랑(三太郞)이라 불렸다. 같은 해 3월 무렵 일본인 모리하야시[森林音次郞]가 들어와 최초로 잡화점을 열었고 이로써 일본의 민간인이 김천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어 1906년 3월 토목, 소방, 위생, 교육 사업을 촉진하고 일본인의 발전을 목표로 김천일본인회가 창립되었으며 10월에는 대구이사청으로부터 거류민단 설립을 인가 받아 본격적인 일본인 사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24년 1월에 열린 일본 ‘동궁전하어성혼(東宮殿下御成婚)’을 계기로 일본인 지방 관료와 토목, 위생, 상공업 등 여러 민간 사업자들 간의 사교 및 여론 조성 단체로서 김천 이육회가 결성되었다. 여기에 조선인으로서 김천의 유지였던 고덕환(高德換)이 참여한 것으로 볼 때 일본인이 모임을 주도하되 일부 조선인 유지가 참여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천 이육회의 주요 임원은 간사 와타나베[渡邊榮太郞], 카노우[加納安正], 오카다 소오사부로[岡田松三郞], 사카가미 마사노스케[坂上政之輔], 고덕환 등이었다.
위에서 동궁전하란 일본 황태자, 즉 머지않아 쇼와 천황이 된 히로히토[裕仁]를 말한다. 히로히토의 결혼식은 원래 1923년 겨울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관동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연기되었다가 1924년 1월에 열렸다. 서울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이 건립되기도 했다. 김천에서는 이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봉축연이 열렸고 이 자리를 빌어서 김천 이육회가 결성되었다. 그 뒤 수차례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나 그 이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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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0 |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 1) 당시 아라이[荒井初太朗]가 운영하던 황정조(荒井組)가 ->당시 아라이[荒井初太郞]가 운영하던 황정조(荒井組)가 2) 황정조(荒井組)의 경영주 아라이[荒井初太朗]는 ->황정조(荒井組)의 경영주 아라이[荒井初太郞]는 3) 일본인 모리하야시[森林音次朗]가 들어와 ->일본인 모리하야시[森林音次郞]가 들어와 4) 오카다송사부로[岡田松三朗], 사카가미 마사노스케[坂上政之輔], 고덕환 등이었다. ->오카다송사부로[岡田松三郞], 사카가미 마사노스케[坂上政之輔], 고덕환 등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