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B02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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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최경호 |
[부부 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풍기진씨 열행비 는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앞 방초정(芳草亭) 옆에 자리하고 있다.
열행비의 주인공인 풍기진씨는 1912년에 출생하여 1935년 12월 18일에 24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풍기진씨와 관련한 이야기는 지금도 마을 주민들, 특히 마을의 아낙네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원터마을은 열부 최씨와 진씨 등의 이야기처럼 부부의 신의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살아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어르신들은 자녀와 마을 청년들에게 부부 간의 배려와 마음가짐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고 한다.
[정절을 지킨 풍기진씨]
풍기진씨는 진희태(秦喜泰)의 딸로 1912년 대구(大邱)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연안(延安)인 이기영에게 시집을 가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동기간에도 우애가 깊어 온 집 안의 복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해 남편이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풍기진씨가 하늘에다 자기 목숨과 대신해 줄 것을 빌었지만 남편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마침내 대구에 있는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남편의 증상이 복막염으로 확대되었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1935년 11월 초 대구 친정에서 남편이 사망하자, 풍기진씨는 “남편은 내가 죽인 것이다.”라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녀는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한없이 슬퍼하였다. 무지했기 때문에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죽였다는 원통함과 남편에 대한 죄스러움이 그녀로 하여금 죽을 결심을 하게 했다. 남편의 장례 준비를 손수 마련해 놓은 눈 오는 밤, 풍기진씨는 “남편이 찬방에 홀로 누웠는데 내가 어찌 더운 방에서 자랴.” 하며 얼어서 죽을 각오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 눈이 오는 마당에 누웠다. 그러나 곧 집안사람에게 발각되어 남편을 따르지 못하자,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남편의 시체 옆에 가서 반듯이 누웠다. 그리하여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고 남편을 따라갔다.
1935년 12월 18일, 풍기진씨가 남편이 죽은 방에서 따라 죽자 전국 각 유림에서 애도문(哀悼文)과 제문(祭文), 만사(輓詞) 등을 보내 왔으며, 1937년 3월에는 정려를 세워 후세인의 본보기로 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 24세였다.
[열행비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도 내려 걷다]
이러한 풍기진씨의 열행은 지역 주민은 물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하여 풍기진씨의 뜻을 높이 기려 말을 타고 마을을 지나가던 이들도 이 열행비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는 말이 전해진다.
유교적 전통을 숭상하는 원터마을 주민들에게 풍기진씨의 열행은 그들의 자긍심을 더욱 높여 주는 일로 인식된다고 이철응[1945년생] 씨는 말한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어른을 공경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은 곳이지요. 방초정이 그렇고, 명성재가 그렇고, 열행비가 그렇지요.”
풍기진씨 부인의 열행 사실은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의 속편(續編)인 『영남삼강록(嶺南三綱錄)』 19권과 1975년에 펴낸 『충의효렬지(忠義孝烈誌)』 열부(烈婦) 편에 각각 실려 전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