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81 |
---|---|
한자 | 麻谷寺事蹟立案 |
영어의미역 | Evidence Drafting of Magoksa Temple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성격 | 고문서|사적입안 |
---|---|
관련인물 | 임원횡 |
발급자 | 임원횡 |
소장처 | 마곡사 |
소장처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마곡사에 소장되어 있는 사적입안.
[개설]
「마곡사 사적입안(麻谷寺事蹟立案)」은 1851년(철종 2) 임원횡이 정리한 마곡사의 연혁에 관한 문서로, 제일 자세하며 사적입안이 작성된 이후의 중수 현황은 마곡사에 전해 내려오는 몇몇 현판을 통해 간단하게 살필 수 있다. 「마곡사 사적입안」에는 마곡사의 연혁을 비롯한 마곡사 전반에 걸친 여러 가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구성/내용]
1. 마곡사 연혁
마곡사의 연혁에 대해서는 「마곡사 사적입안」과 그 내용을 보충한 겸사입안완문(兼使立案完文)에 가장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적입안의 전반 부분은 네 차례에 걸친 조선왕조 이전의 창건에 관한 내용이고, 후반 부분은 조선왕조 때의 중창불사에 관한 내용이다. 사적입안에서는 마곡사의 창건자를 자장율사로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화산(泰華山)의 임해룡자좌(壬亥龍子坐) 무득갑파지국(戊得甲破之局)에 자리 잡은 마곡사 터는 동방 제일의 복지(福地)이다. 당나라 정관(貞觀) 17년(643), 곧 신라 선덕여왕 9년(정관 17년은 선덕여왕 12년이니 3년의 착오가 있음)에 자장율사가 중국으로 들어가 당 태종을 뵈니, 태종은 제자의 예로써 율사에게 국통(國統)의 호를 내렸다. 자장율사가 귀국하자 선덕여왕이 그 소식을 듣고 자장을 국통으로 봉하니, 이는 법과(法果) 사문을 안성후(安城侯)에 봉하고 불공법사(不空法師)를 숙국공(肅國公)에 봉했던 일과 마찬가지이다. 전(田) 200결을 내리니 동쪽으로 기름재에서 서쪽으로 구재까지였다.”
하지만 자장율사를 창건주로 한 이 내용은 신빙성이 약하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자장이 십여 군데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마곡사 사적입안」에는 7대 가람을 창건하였다고 바뀌어 있다.
2. 마곡사의 터
「마곡사 사적입안」에 보조와 도선, 그리고 조선 명종 때의 학자인 남사고(南師古)의 마곡사 터에 대한 비결이 담겨 있다.
“금(金) 승안(承安) 4년(1199)은 고려 명종 때인데, 이때 신승인 불일보조가 폐찰을 중건하라는 왕명을 받고 제자 수우와 함께 명승을 두루 다니다가 이 자리에 와서는 다리에 올라가 춤을 추면서 ‘복지가 맑은 개울에 임하였으니 금방울 소리가 소나무 사이에서 울린다(福地臨淸澗 金鈴激松間)’라는 시를 읊었다. 후세 사람들이 무교(舞橋)라고 하는 다리가 바로 그 다리이다. 그리고 절 땅을 점지하면서 ‘은첨금지덕준룡이(恩沾金池 德峻龍耳)’의 형국이라 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도적들이 거처하고 있어 절을 지을 수가 없었지만 수우가 신묘한 방법을 써서 수만의 도적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절을 세웠다. 그러자 국왕이 전 200결을 내리면서 그를 국통 국사로 삼았는데, 개울 서쪽의 미타주와 북쪽의 3부도전, 그리고 남쪽의 율암(栗菴)과 여러 묘가 당시의 유적이다. 지금 이 절의 승려들이 개울 서남쪽에 국사당이라는 작은 사당을 별도로 지어 범일, 도선과 함께 보조를 모시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을 잊지 않고자 함이다.
그 뒤로 범일대사가 다시 중창하였고, 도선대사도 다시 점지하기를 ‘천만년 오래도록 절이 들어앉아 있을 큰 터이며 삼재가 들지 못하는 곳(儘千萬古 爲刹之大地 三災不入之處)’이라고 하였다. 또 ‘유구와 마곡 두 냇가 사이는 천 사람의 목숨을 살릴 만한 곳(維鳩麻谷兩水之間 可活千人之命)’이라 하고 이곳을 몰래 집이나 묘로 쓰면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담은 문적들은 병화에 다 사라지고 없으니 안타깝다.
조선 초 남사고는, ‘유구마곡 양수지간은 만인의 생명을 살릴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보조국사의 비결에서도 이미 ‘은첨금지덕준룡이’라 하였으니 사람들이 함부로 이곳을 점찍고자 한다면 어찌 참람(僭濫)하다 아니하겠는가?”
「마곡사 사적입안」에는 “초창(初創)이 자장이요, 재조(再造)는 보조이며, 삼건(三建)은 범일이요, 사수(四修)는 도선이며, 오성(五成)이 각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자장이 창건하였다는 전설은 신빙성이 없지만, 신라의 보조 체징과 통효 범일 그리고 도선스님과 마곡사와는 어떤 관계가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마곡사 사적입안」은 마곡사의 창건 연대나 연혁, 내력 등을 알 수 있는 문서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록이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의상이나 자장과 같은 인물에 절의 권위를 가탁(假託)하기 위하여 꾸민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