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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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客基- |
영어음역 | Gaekginaruteo |
영어의미역 | Gaekgi Ferry |
이칭/별칭 | 손터나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황상일 |
성격 | 나루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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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에 있던 가야시대 나루터.
[개설]
객기나루터가 위치한 곳은 본래 현풍군 왕지면(旺旨面) 지역으로서 소재지는 왕지면 새터 471번지이다. 1896년(고종 33년) 지방 관제 개편에 의하여 고령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터, 새터와 하미면의 사등동을 병합하여 객기동이라 해서 우곡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洞)’이 ‘리(里)’로 바뀌면서 객기리가 되었다. 손터, 객기(客基)라는 나루명은 대가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손님을 보내고 맞는 나루터가 있었으므로 손터 또는 객기라 하였다.
객기나루가 당시 크게 번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다는 사실은 인근 지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인근에 새터마을이 있는데, 새터, 정터, 점기(店基), 정기(鼎基, 正基) 마을은 손터나루와 함께 형성되었다. 옛날 새터마을에 그릇점이 있어 손터나루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는데, 그릇점이 있는 곳이라 하여 점터라 하였다. 또 지형이 솥발같이 생겼다 하여 정터라 하며, 지금은 정기(正基)라 부르고 있다.
그 연유는 손터가 객인이 잘되는 곳이라면 정기는 사람[人]이 잘되고 중심이 되는 좋은 터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며, 옛날에는 객기 인근 3개 마을 중 가장 부유한 마을이었다. 새터마을은 신기(新基)라고도 불렸는데, 양전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 형성된 마을로서 1936년 홍수로 인하여 집과 전답이 유실, 파괴되어 새로 집을 지었다 하여 신기 또는 새터라고 하였다.
경상북도 고령과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낙동강은 고령군의 동단인 다산면 호촌리 사문진나루터에서 남단인 우곡면 객기리 객기나루터까지 51.3㎞를 지나 경상남도 지역으로 이어진다. 고령 지역을 흐르는 낙동강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개산강’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령 지역은 낙동강 중류의 우안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토양이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낙동강을 이용한 하천 교통의 요충지로서 널리 알려졌다. 이에 따라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관물과 공물을 수송하였으며, 개포나루를 이용하여 강화도 『팔만대장경』을 해인사(海印寺)로 운반하는 등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물자 수송과 인적 교류가 많았다. 더욱이 다산면과 성산면, 개진면, 우곡면 등의 4개 면이 낙동강에 인접하여 수운이 발달하였는데, 수로 수송은 1905년(고종 42) 철도가 부설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운송 수단으로 육로보다 수운을 많이 이용한 이유는 선박의 경우 육로에 비해 수송비가 훨씬 저렴할 뿐 아니라 한 번에 많은 양을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한 가지 불편한 것은 추운 겨울철 결빙기[12~2월]가 되면 선운이 중지되는 일이었다.
당시 상행 화물은 주로 소금과 해산물이었는데 후대에 와서는 석유 등이 주 화물이었으며, 하행 화물은 곡물이었다. 특히 김장철인 10~11월과 장 담그는 철인 3~4월은 소금 성수기로서 소금 배는 앞을 다투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당시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배는 400여 척에 달하였으며, 다산면 사문진에는 통과세를 받는 징세소가 설치되었다.
이처럼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선운이 발달됨에 따라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의 전쟁 물자를 운송하는 수운으로 활용되어 큰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왜군은 1592년(선조 25) 부산포를 통해 침략을 강행하였는데, 당시 낙동강은 이들이 북상하는 주요 루트로 활용되었다. 이때 고령 출신 의병장인 송암 김면(金沔)은 개진면 개포에서, 인접한 마고산성에서는 박정완(朴廷琬), 박정번(朴廷璠) 형제가 왜병을 무찔러 전쟁 물자 수송을 원천 봉쇄한 바 있다.
한편 고령 지역에서 낙동강은 심하게 곡류하여 다산면의 노곡리와 평리리 일대를 비롯해 개진면 생리, 우곡면의 봉산리, 포리 일대에 충적 평야를 형성하였으며, 이 하천은 하상 계수가 높아서 주기적으로 홍수를 일으켜 재해를 유발하였다. 이와 같은 악재도 있었지만 낙동강으로 인한 수로 발달로 인해 강변 나루터 역할도 매우 컸다. 대구와 인접한 다산면 호촌리 사문진나루터는 달성군 화원을 잇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하였다.
[변천]
객기나루터는 고령 관내에 있는 나루터 가운데 오래된 것으로 이미 가야시대에 조성되었다. 인근의 세미(税米)를 객기나루에서 배에다 싣고 운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포와 하단 등지에서 낙동강 물길을 따라 올라온 물자가 객기나루를 경유하여 낙동강 연안의 내륙으로 운반되었다. 역으로 낙동강 연안 내륙으로부터 싣고 온 농수산물 배가 객기나루에 정박하여 쉬어 가거나 인근에서 집산된 곡물을 실어 하류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객기나루는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에서 창녕군 이방면으로 가는 나루로서, 예전에는 낙동강 건너편 이방장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낙동강을 이용해 김해, 구포(亀浦) 등지와 멀리는 왜국과도 통하던 하천 교통 요지였으며 창녕(昌寧), 마산(馬山) 등지를 비롯한 경상남도 지방과 고령 해인사, 성주(星州) 지방과 육로 교통을 연결하는 요지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고령 방면으로 침공하던 왜군이 이곳을 통과하기도 하였다.
객기나루의 뱃사공이었던 마을 주민 이정호[66세]에 따르면, 처음에는 큰 노와 삿대를 이용하여 나룻배를 이동하였는데 삿대는 낙엽송과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룻배를 사공 서너 명이 직접 저어서 낙동강을 왕래하였는데, 배 삯은 현금보다는 보리와 벼를 주로 받았다고 한다. 객기나루는 주위에서 가장 큰 수상 교통으로서 하루에 수백 명이 왕래하였지만, 현재는 육상 교통의 발달로 폐쇄된 지 17년 정도 되었다.
[현황]
2010년 현재 객기나루터는 낙동강 제방의 축조와 물길의 변화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육상 교통의 발달로 그 명칭만이 남겨진 채 객기나루는 사라진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