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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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卓愼 |
영어공식명칭 | Tak Sin |
이칭/별칭 | 자기(子幾),겸부(謙夫),계위(係危),죽정(竹亭),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다성 |
출생 시기/일시 | 1367년 - 탁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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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89년 - 탁신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395년 - 탁신 효자로 정려 |
활동 시기/일시 | 1398년 - 탁신 효행으로 우습유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04년 - 탁신 사간원좌정언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08년 - 탁신 사헌부집의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09년 - 탁신 나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410년 - 탁신 전농시정 및 성균관사성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11년 - 탁신 동부대언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15년 - 탁신 좌대언으로 병권 정비 관련 6개조 건의 |
활동 시기/일시 | 1416년 - 탁신 지신사, 경승부윤, 이조참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418년 - 탁신 예조참판, 동지경연사, 공안부윤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419년 - 탁신 예문관제학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20년 - 탁신 집현전제학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21년 - 탁신 성균관사성으로 박사 겸직 |
활동 시기/일시 | 1422년 - 탁신 의정부참찬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426년 - 탁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426년 - 탁신 예조에서 치제 |
추모 시기/일시 | 1699년 - 탁신 안동세덕사에 배향 |
부임|활동지 |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
부임|활동지 | 탁송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535-1의 무양서원 건너편 주택단지 |
사당|배향지 | 안동세덕사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박실골길 8[구수리 695] |
성격 | 문관|효자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예조참판|동지경연사|의정부참찬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동지경연사, 예문관제학,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효자.
[가계]
탁신(卓愼)[1367~1426]의 본관은 광산, 자는 자기(子幾)·겸부(謙夫), 호는 죽정(竹亭)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평장사 탁영(卓英), 할아버지는 직제학 탁문위(卓文位), 외할아버지는 김인검(金仁儉)이다. 아버지는 좌간의대부 탁광무(卓光茂)이며, 어머니는 판종부시사 박지연(朴之衍)의 딸이다. 부인은 정인진(鄭麟晉)의 딸로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활동 사항]
탁신은 1389년(공양왕 즉위년) 동진사(同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모가 연로하여 고향에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1395년(태조 4)에 효자로 포상과 정려(旌閭)가 이루어졌다. 1398년(정종 즉위년) 효행으로 천거되어 우습유(右拾遺)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직하였다. 탁신은 어머니의 상사를 마친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임명되었다가 1404년(태종 4)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었고,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1408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그해 8월 언관으로서 태종의 사위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군사를 발병한 사건에 조대림의 죄를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로 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1409년(태종 9) 나주(羅州)로 유배되었다. 탁신은 곧 사면되어 1410년(태종 10) 전농시정(典農寺正)과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다. 1411년(태종 11)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제수되고, 1415년(태종 15) 좌대언(左代言)으로서 병사(兵事)에 관한 6개조의 비사책(備事策)을 올려 병권의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탁신은 1416년(태종 16) 지신사(知申事)·경승부윤(敬承府尹)·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418년(세종 즉위년) 예조참판(禮曹參判)·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공안부윤(恭安府尹)에 올랐다. 1419년(세종 1)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에 임명되었으며, 1421년(세종 3) 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자 탁신은 성균관사성으로 박사를 겸하였다. 1422년(세종 5)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으며, 이 밖에도 태종의 배향공신 논의, 지지(地誌)·주군 연혁 편찬, 동전과 저화(楮貨) 교환 논의, 『고려사(高麗史)』 편수 과정 등에 참여하였다. 1426년(세종 8) 나이 60세로 사망하였다. 탁신은 경학(經學)에 밝고, 무예·음률에도 능하였다.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위주로 하였다. 탁신은 당시의 광주 천곡리(泉谷里)에 정자를 지었는데 노송이 있어 탁송정(卓松亭)이라 불렀다.
[상훈과 추모]
탁신의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426년(세종 8) 예조에서 치제(致祭)하였으며, 탁신에게 제사 지낼 때 인순부(仁順府)에서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서연관(書筵官)이 제문을 짓고, 내시원(內侍院)에서 향을 올리며, 서연관이 치전관(致奠官)이 되고,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이 축사(祝史)가 되도록 하였다.
탁신은 성주(星州)의 오계사(梧溪祠)[현재의 위치는 불분명]에 제향되었으며, 1699년(숙종 25) 탁순창(卓順昌)이 세운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안동세덕사(安東世德祠)에 아버지 탁광무와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