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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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蘭溪實記 |
영어공식명칭 | Nangyesilgi |
이칭/별칭 | 난계집(蘭溪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세인 |
간행 시기/일시 | 1907년 - 『난계실기』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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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전남대학교도서관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성격 | 시문집 |
저자 | 박종정 |
간행자 | 박인순 |
권책 | 2권 1책 |
행자 | 10행 21자 |
규격 | 24.8×16.1㎝[반곽(半郭)] |
어미 | 내향이엽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尾) |
권수제 | 난계집 |
판심제 | 난계집 |
[정의]
조선 전기에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출생한 문인 박종정의 시문집.
[개설]
『난계실기(蘭溪實記)』는 16세기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문인 박종정의 행적과 시문을 엮어 만든 문집이다.
[저자]
박종정(朴宗挺)[1555~1597]의 자는 응선(應善), 호는 난계(蘭溪),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555년(명종 10) 전라도 광주에서 박인(朴訒)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으며, 특히 사부(詞賦)[운자(韻字)를 달아 지은 한시]를 잘 지었다. 1576년(선조 9) 식년시(式年試) 진사에 합격하였고, 그 후 전라남도 송광산(松廣山)에 들어가 학문에 깊이 정진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공부로 병을 얻게 되어 공부를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와 난계정사(蘭溪精舍)를 짓고 심신 회복에 힘쓰며 서책으로 소일하였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 많은 호남 유생들이 이발(李渤)을 논핵(論劾)[잘못이나 죄를 논하여 꾸짖음]하는 상소에 이름을 올렸으나, 박종정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이발(李潑)[1544~1589]과의 친분을 지키며 동참하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때 동참한 동지들과 왜적을 막을 수 있는 의견을 적어 조정에 보냈다. 선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장원서별제(掌苑署別諸)를 제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부모와 함께 전라남도 영암(靈岩)으로 피란을 떠나던 도중에 적병을 만나 부친을 대신하여 공격을 막아내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향년 43세였다.
[편찬/간행 경위]
박종정의 저술은 전란 중에 유실되어 남아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이에 1907년 후손 박인순(朴麟淳)이 박종정의 문인들이 간직해 오던 유문을 수습하고, 후대 문인들이 박종정과 관련해 지은 시문을 붙여서 문집을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난계실기』 저본은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으로, 목활자본(木活字本)이다. 판식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반곽(半郭) 24.8×16.1㎝이며 계선이 있다. 반곽의 행자수는 10행 21자, 어미는 내향이엽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尾)이다. 표제·권수제(卷首題)·판심제(版心題) 모두 ‘난계집(蘭溪集)’이다.
[구성/내용]
『난계실기』는 전체 2권 1책으로, 권두 서문은 정기(鄭琦)가 썼다. 권1에 시(詩) 7수, 소(疏) 1편, 서(書) 3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2는 부록으로, 박인순이 쓴 가장(家狀), 김문정(金文銓)의 묘갈명(墓碣銘) 등 후인들이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상행재소(上行在疏)」는 임진왜란 때 행재소로 피신한 선조에게 전란의 계책을 올린 글이다. 서(書) 중 「여윤오음(與尹梧陰)」은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이었던 윤두수(尹斗壽)에게 보낸 글이다. 윤두수는 박종정 처(妻)의 이모부로서, 편지는 광주목사 권율(權慄)을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임명해 줄 것을 간청하는 내용이다. 이후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으며, 임진왜란에서 전공을 크게 세웠다. 이 밖에 남은 2편의 편지글은 제자인 안방준(安邦俊)에게 보낸 것이다.
[의의와 평가]
박종정의 문집 『난계실기』는 임진왜란의 전황과 광주 및 호남 유생들이 전란에 대응하는 양상을 연구하는 데 사료적 가치가 높은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