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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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五一八民主化運動-南洞聖堂 |
영어공식명칭 | Namdong-Catholic |
이칭/별칭 | 남동 5.18 기념성당,남동 5.18 민주화운동 기념성당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67[남동 55]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옥 |
[정의]
[개설]
전라남도 도청이 있는 광주내 중심로의 남동성당은 설립 초기부터 6.25전쟁의 수난을 겪었고, 5.18민주화운동 기간에는 민주화의 열망을 결집하는 장소가 되어 호남 지역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있던 장소이다.
[수습대책위원회와 남동성당]
남동성당은 시련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공산당에게 본당을 빼앗기고 박문규 미카엘 신부가 체포 명령으로 감금되었다. 1980년 5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엄격한 사회의 검열 시스템에 모두 숨죽이며 지하로 숨어들 때, 가톨릭 정의 평화 구현 사제단은 시국을 걱정하며 목소리 높여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그러자 광주시민에게 존경을 받았던 인권 변호사, 교수, 목사 등 재야 인권 운동가들이 남동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당시 주임 신부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와 함께 인권에 대한 뜻을 같이하며 광주시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한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남동성당은 수습대책위원회가 모이고 토론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광주시민들은 남동성당을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인식하고 신뢰하였으며 성당에서 이러한 상황을 원만하게 수습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광주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계엄군과의 협상을 맡았지만 미온적인 태도를 가진 위원들이 문제시되면서 새로운 대책위원회 구성이 시급하였다. 이러한 시민의 요구를 부응하기 위해서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1980년 5월 23일 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하여 시민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사제로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시민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가 만든 남동성당 수습대책위원회와 기존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일원화하는 작업은 조비오 신부가 하였다.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더 이상의 폭력 없이, 오로지 대화를 통해 광주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1980년 5월 26일,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수습위원회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협상을 위한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들을 따르는 광주시민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으며, 외국인 기자들도 30여 명이나 따라 나섰다. 이들은 계엄군과 협상하기 위해 4㎞가 되는 거리를 도보로 행진하였다.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군을 후퇴시키라는 요구를 했고, 이에 군과 아무런 충돌 없이 협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협상 대상이었던 계엄군의 완고한 태도로 협상이 결렬되자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경계가 삼엄했던 광주를 탈출하여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리고 광주의 실상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낱낱이 보고하였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5.18민주화운동 당시 보고 들은 참상을 있는 그대로 쓴 「분노보다는 슬픔」이라는 수기를 신앙으로 간증하였다. 이로 인해 정부에 의해 철저히 감춰지고 언론에도 은폐, 왜곡되었던 계엄군의 시민 학살 만행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수기는 국내에는 물론 해외로까지 삽시간에 번역되어 전파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동성당은 인권운동의 성지로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다.
5월 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직후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주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1980년 6월 14일 보안사에 자진 출두하였다. 그러나 보안사는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를 폭동 및 내란음모죄라는 명목하에 수사를 진행했으며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를 고문하였다.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수감된 지 25일 후 보안대 지하실에서 송정리 공군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허위 날조된 내란죄를 인정한다는 서명 날인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수사 방향은 이미 짜여진 각본에 의하여 정해져 있고 그 조사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짐작했고 날조된 죄명이 절대 변경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날조된 조서에 따라 기소되어 광주 상무대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섰고, 1심에서 내란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고등 군사재판에 항소하여 7년으로 감형받았다. 무죄라고 확신한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결국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1981년 8월까지 1년 2개월 복역 후 출감하였다.
[5월운동과 추모미사]
1980년 5월 민주화운동 진압 이후, 광주에서는 국가 권력이 조성한 공포 분위기와 혹독한 폭압에 짓눌려 대학생들의 저항 시위를 제외하고는 각계각층의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 운동이 침체되었다. 대한민국은 계엄령 하에 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도 사실상 준계엄 사태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인권 운동 단체나 운동가들의 수난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동성당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회 또는 강론, 성명서를 통해 정부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하는 저항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81년부터 광주 교구청과 사제단 주관 추모 미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남동성당에서 봉헌되고 있다. 초기 미사는 순수한 추모 미사라기보다는 독재 권력에 대한 투쟁이자 저항적인 성격이 더욱 강한 행사였다. 남동성당에서 열린 미사를 보기 위해 성당 신자뿐만 아니라 5.18민주화운동 유족들, 대학생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까지 모여들어 본당 내외는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인근 주변까지 마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많은 인파들이 모일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대형 확성기를 옥외에 설치하고 미사를 진행하였다. 이 미사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은 모두가 5.18민주화운동을 기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거나 정의감이 투철하고 부당한 국가권력에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미사가 열릴 때에는 수많은 경찰들이 시위로 발전할 것을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 발사기와 곤봉으로 무장을 하고 성당 주변에서 감시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남동성당과 광주시민들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를 이어갔다. 미사는 많은 군중들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어 두세 시간씩 진행되곤 했으나 시민들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 질서 있게 행동하였다. 미사가 끝나면 광주시민들은 "군사 정권 물러가라, 구속자를 석방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를 했고, 진압 경찰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진압 경찰들은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사제 관내까지 최루탄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시위로 인한 충돌 사건은 1981년 이후부터 5, 6년간 이어졌다.
1982년 10월 전남대학교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광주교도소에서 사망하자 빈소를 설치하여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사람들을 독려하였다. 이러한 남동성당의 추모미사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의 정당한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여 법 제정이 성사되었고, 책임자들을 단죄에 처할 수 있었다. 남동성당은 '광주비디오'를 상영하며 5.18민주화운동의 왜곡된 진실을 밝히는 데에도 앞장섰다.
[의의와 평가]
남동성당은 1980년 5월 민주화운동 당시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를 비롯한 12명의 민주 인사들이 모여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수습대책 8개 조항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장소로 의미가 크다. 종교계 인사이지만 누구보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가 활동했던 성당이었으며, 그로 인해 '인권운동의 성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광주시민은 남동성당을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인정하게 되었고, 성당에서 이러한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해 줄 것이라 기대하였다.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가 광주를 떠나 상경하여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1980년 5월의 광주를 알린 일은 대한민국 국민, 전 세계에 경종을 울린 계기가 되었다.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가 쓴 「분노보다는 슬픔」수기는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를 폭동 및 내란음모죄를 저지른 죄인으로 만드는 증거자료가 되었으나 훗날 우리에게 귀중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생생한 기록물이 되었다.
남동성당은 5월 민주화운동 후에도 꾸준히 추모 미사를 진행해 5월 민주화운동이 단 기간의 투쟁으로 끝나지 않고 부당한 국가권력에 투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국가권력의 억압으로 주춤했던 저항운동에 굴하지 않고 천주교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저항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특별법이 제정되고 책임자들을 단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결성식도 남동성당에서 진행되었을 만큼 호남의 인권운동, 저항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5월이 되면 남동성당은 5.18민주화운동 관련 추모 미사를 지속하고 있으며 신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현황]
2005년 5월 16일 5·18 민주화운동 25주년을 맞아 남동성당은 광주광역시 25번째 5.18민주화운동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며 천주교 광주대교구로부터 5.18 기념성당으로 선포되었다. 이때 조성된 성모동산은 호남의 중심인 무등산을 형상화하였고, 동산 안에는 광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상이 있다.
[건물 정보]
남동성당이 건립되기 전 광주에는 북동성당 한 곳밖에 없었다. 일제의 도시 정책으로 인하여 광주가 성장하게 되면서 북동성당의 신자 수가 증가하게 되어 새로운 본당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1949년 7월, 당시 교구장이었던 안브레난 몬시뇰의 지시로 광주 북동성당 주임 신부가 현재의 부지에 대지 580여 평[176㎡]에 목조 기와집 12칸, 부석건물 3동[당시 임내과 의원]이 속한 건물 70평[21㎡]을 매입하고 김 아구스티노를 시켜 개축 수리하여 새로운 성당[남동성당]을 설립하였다. 1949년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맞아 145명의 신자로 봉헌식을 갖기로 하고 본당 신부로 나주성당 주임이었던 박문규 미카엘 신부를 발령하며 광주에서 두 번째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 후 남동성당은 사목 활동에 열정을 쏟은 사제와 신자들의 적극적인 포교 활동으로 본당의 확장이 요구되어 1952년 120평[36㎡]의 건물을 신축하고 1983년 성당 후면에 대로를 개설하고 정문이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가늘고 긴 사각형으로 구성되었으며 외벽은 붉은색 벽돌로 쌓았다. 성당 내부는 2층을 받치는 십자형 기둥에 성수를 담아 놓는 성수대를 설치해 놓았으며 창문은 전통방식인 띠살창을 설치하였다.
남동성당은 1964년 8월 계림동성당, 12월 월산동성당, 1966년 6월 방림동성당, 1968년 2월 호남동성당, 1970년 지산동성당을 분리하였다. 본당 설립 이래 12명의 사제를 배출하는 등 호남 지역의 복음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