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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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光善 |
영어공식명칭 | Go Gwangseon |
이칭/별칭 | 현와,원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
집필자 | 박미선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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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고광선 봉산 산중으로 들어감. |
몰년 시기/일시 | 1934년![]() |
추모 시기/일시 | 1964년 - 고광선 봉산사에 향사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6년 - 고광선 엄이재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 고광선 봉산정사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2년 - 고광선 『현와유고』 석인본 간행 |
출생지 | 전라도 광주목 유등곡면 압보촌 |
거주|이주지 | 엄이재 -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 |
수학|강학지 | 봉산정사 -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 |
묘소|단소 |
봉산정사 건너편 왼쪽의 산록![]() |
사당|배향지 | 봉산사 -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산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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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장흥 |
조선 후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학자.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원여(元汝), 호는 현와(弦窩)이다. 복헌(復軒) 고정헌(高廷憲)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고박주(高璞柱)이다.
고광선은 1855년(철종 6) 전라도 광주목 유등곡면 압보촌[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복촌(復村)에서 태어났다. 1862년(철종 13)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송독(誦讀)에 능하였다. 1864년(고종 1)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세 살이었던 동생을 보살피고 계모 광산김씨(光山金氏)를 친모처럼 섬겨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1864년(고종 1) 열 살이 되던 해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면서 제자백가를 섭렵하였다. 나도규의 스승이었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곳이 있으면 열심히 질문하여 깨우쳤으므로 기정진이 기특하게 여겼다. 성품은 온유하였으나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고칠 줄 알아 기정진도 이를 장하게 여겼다. 부친상을 먼저 당하고 모친상을 당하게 되자 상례를 법대로 하였으며, 음식을 절제하고 슬픔을 다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당시, 상황에 대한 근심으로 기정진과 협력하여 거동을 바르게 하였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몸은 비록 척박한 시골에 있으나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뜻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봉산의 산중으로 들어갔다. 1906년(광무 10)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에 엄이재(掩耳齋)를 지었다. 엄이는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과의 단절을 원한 것이었다.
1910년(융희 4) 국치일을 맞게 되자 백의백립(白衣白笠)으로 북향하여 통곡한 후 엄이재에 은둔하였다. 그러나 학도들이 가르침을 얻으려 모여드니 1919년 엄이재 옆에 봉산정사(鳳山精舍)[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를 지어 그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8년에는 고종이 승하하자 엄이재의 북쪽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이를 읍궁암(泣弓巖)이라고 부른다.
1934년 12월 25일 아침 이질(痢疾)에 걸린 와중에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식과 조카들이 본집으로 옮기고자 했으나 다음날 봉산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와유고(弦窩遺稿)』는 16권으로 시 247편, 문 1439편으로 총 1686편이다. 문집은 서(書), 기(記), 비명(碑銘), 행장(行狀), 찬(贊), 발(跋), 잡저(雜著)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6년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목활자본으로 9권 4책이 간행되었고, 1962년 석인본(石印本)으로 16권 8책이 간행되었다.
봉산정사 건너편 왼쪽의 산록 사좌원(巳座原)에 있다.
고광선의 문인들이 엄이재 옆자리에 영당을 건립하여 제향해 오다가 1964년 향교 유림들이 논의하여 봉산정사를 봉산사(鳳山祠)로 이름을 고치고 그곳에 향사(享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