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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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澈 |
영어음역 | Hacheol |
이칭/별칭 | 백응(伯應),설창(雪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6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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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04년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종화리 정개산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진양(晉陽) |
[정의]
조선 후기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백응(伯應), 호는 설창(雪牕)이다. 고려 시대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참봉(參奉) 하철부(河哲夫)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봉직랑(奉直郞) 하무제(河無際)이며, 할아버지는 사헌부집의에 증직된 하광국(河光國)이다. 아버지는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1603~1651]이며, 어머니는 유수창(柳壽昌)의 딸 전주 유씨(全州柳氏)이다. 백부는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이다.
하홍도는 “남명 이후에 일컬어질 만한 오직 한 사람[世稱南冥後一人]”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큼 경상 우도의 뛰어난 학자이며 남명학의 계승자이다. 부인은 박신(朴紳)의 딸 고령 박씨(高靈朴氏)이며, 그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하덕망(河德望)이며, 그다음으로 하덕윤(河德潤)·하덕휴(河德休)·하덕건(河德建)·하덕원(河德元)을 두었다. 사위는 이몽규(李夢奎), 신경삼(辛景參), 조합(趙柙)이다.
[활동 사항]
하철(河澈)[1635~1704]은 어릴 적부터 겸재 하홍도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으며, 과거에 응시하여 현달하기보다는 학문을 탐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데 전념하였다. 당시 하홍도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하철이 항상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겸재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들과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 하철은 동문들 중에서도 글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이 높았는데,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1583~1640]이 그의 뛰어난 자질을 보고는 질녀(姪女)를 시집보냈다. 이로부터 하철은 집안에서는 겸재를 모시며 배웠고, 집 밖에서는 무민당 박인을 따르며 학문을 익혔다.
겸재가 손발이 저리는 병에 걸려 거동하기 불편하자, 더욱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일을 시중들었다. 또한 손님을 맞이할 적에는 곁에서 모시고 대신 접대를 하였는데, 행동과 일처리가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왕명을 받아 어사(御史)로서 겸재 하홍도에게 예법에 관한 것을 묻고 난 후 복명할 적에, 겸재 하홍도의 학문과 덕행을 말하면서 하철의 예법도 볼 만한 것이 많았다고 칭송하였다.
이후에 재상 최석정(崔錫鼎)과 관찰사 민창도(閔昌道)가 조정에 그를 천거하였으나, 끝내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겸재의 사후에는 서원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우는 일 등을 몸소 주관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겸재의 유고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원근의 관련된 집안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글을 수습하여 『겸재집(謙齋集)』을 간행하였다.
[학문과 저술]
하철은 경서를 깊이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양(陰陽)·천문(天文)·수학(數學)·활쏘기 등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특히 서법(書法)에 조예가 깊어 명필로 이름나 비석·현판·병풍 등의 글씨를 청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서법에 대해 “마음의 자취는 붓의 자취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니, 글씨를 익히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글씨의 기교에 앞서 마음 공부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1676년 겸재를 추모하기위해 종천서원이 건립되자 그 편액을 썼다.
만년에 입덕문(入德門) 앞에 작은 정자를 지어 학문과 수양에 힘쓸 곳으로 삼았는데, 이곳이 바로 설창강 가의 서재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설창 선생’이라고 존칭하였다. 남명이 “경(敬)과 의(義)는 우리 집안에 해와 달과 같다”라고 말한 것을 존숭하여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의 일을 반듯하게 처리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는 『주역(周易)』의 내용을 취해 헌(軒)의 이름을 ‘직방헌(直方軒)’이라 하였다.
그리고 주자(朱子)의 오래된 거울[古鏡]에 비유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는 뜻을 흠모하여 누대 이름을 ‘마경대(磨鏡臺)’라고 하였다. 또한 벽에 정이천(程伊川)의 「사물잠(四勿箴)」과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을 붙여 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면서 신명(神明)처럼 공경하였다. 이를 통하여서도 그의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저서로 문집 『설창실기(雪牕實紀)』 2권 1책이 있다. 시·서·행장·묘지명·묘갈명·중수기·상량문 등 다양한 글이 수록되었으나, 성리 철학을 깊이 밝힌 글은 없다. 하철은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단속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관해 이전 사람들이 이미 말하였으니, 학자는 책이 없는 것을 근심하지 않고 실행을 못하는 것을 근심할 뿐이다. 어찌 쓸데없는 설을 지어 사람들의 귀와 눈을 현혹시키겠는가?”라고 그 이유에 대해 말하였다. 이것은 남명이 견지한 “정자(程子)와 주자 이후로는 저술을 지을 필요가 없다”라는 견해를 계승한 것으로, 하철의 학문과 사상이 철저하게 남명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묘소]
묘소는 하동군 옥종면 종화리 정개산(鼎盖山)의 선영 곁에 있다.
[상훈과 추모]
셋째 아들 하덕휴의 공로로 사헌부대사헌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