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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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郡谷里 |
영어공식명칭 | Gungok-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종안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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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곡리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 | |
성격 | 법정리 |
면적 | 5.2㎢ |
가구수 | 165가구 |
인구[남/여] | 312명[남자 151명|여자 161명]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군곡리(郡谷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정리, 안곡리와 은소면의 방처리와 완도군 보길면의 삼마리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로 개설되었다. 방처마을, 군안마을, 현안마을, 신정마을의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방처마을은 조선 말에 들어온 서씨가 입향조라고 하나 자료나 기록은 없다. 마을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조개무지, 움집 주거지 등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930년 백포만방조제가 축조되면서 경작지가 늘어나 마을이 번성하였다. 군안마을은 입향조가 1626년에 들어온 이천서씨 서민홍(徐敏弘)으로 알려져 있다. 군안마을에 조개무지와 대형 독무덤이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군안리(郡安里)는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안곡(安谷)으로 나와 있으며, 현안 앞 마을인 방처·군안 지역을 군안골이라 하였다. 현안마을은 1870년에 경주최씨가 처음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저수지와 간척답이 만들어져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마을에 고인돌과 철기시대 유물이 있다. 현안리(縣安里)는 『호구총수』에 안곡(安谷)으로 나와 있다. 1925년 편찬된 『해남군지』에도 안곡으로 나와 있다. 신정리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신정리(新亭里)는 『호구총수』에 나타나지 않으며, 신정(新亭)이라는 이름 그대로 새로이 터를 잡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입향조로는 소씨들이 월강리와 신정리 사이인 ‘터안’에 자리 잡았다고 하는데, 마을에 소씨 묘가 있고 터안에서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어 집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자연환경]
군곡리는 동쪽에 가공산(駕空山)[335m]이 있고, 달마산 미황사 계곡에서 발원한 송지천을 경계로 가차리·화내리와 마주보고 있다. 백포만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마을 앞이 바다였으며, 바다와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현황]
군곡리는 북쪽으로 현산면 백포리, 동쪽으로 현산면 초호리, 남쪽으로 해원리, 서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5.2㎢이고, 방처리, 군안리, 현안리, 신정리의 4개 행정리에 165가구, 312명[남자 151명, 여자 16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구성되어 있다. 군곡리는 국도 제77호선과 지방도 제806호선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민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주 소득원은 넓은 간척지에서 군곡저수지 농업용수를 이용하여 생산되는 쌀이다. 특작물로 마늘을 재배하고 있으며, 무화과도 재배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2003년 7월 2일 사적 제449호로 지정된 해남 군곡리 패총이 있다. 철기시대의 패총으로서 규모는 8만 3569㎡이다. 해남 군곡리 패총은 1983년 처음 확인되었고,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차에 걸쳐 목포대학교박물관 등에 의해 발굴되었다. 해발 26m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며 너비 약 200m, 길이 약 300m에 이르는 대규모 조개더미 유적이다. 발견된 유구로는 토기 가마터 1기, 주거지 2기 등이 있다. 2018년 11월 28일에는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초본류를 넣어 만든 점토벽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목포대학교박물관은 2018년 11월 28일 송지면 군곡리 일원에서 진행한 발굴 조사 성과를 점검하는 학술자문회의를 열고, 2,000년 전쯤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벽을 비롯해 각종 조개껍데기와 동물 뼈, 토기, 푸른색 유리구슬을 공개하였다. 김건수 목포대학교 박물관장은 “점토벽 강도를 높이기 위해 초본류를 넣는 것은 지금도 사용하는 기술”이라며 “건축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발견”이라고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