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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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岩里 |
영어공식명칭 | Yongam-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병삼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04월 01일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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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리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 |
성격 | 법정리 |
면적 | 9.021㎢ |
가구수 | 295가구 |
인구[남/여] | 594명[남자 294명|여자 300명]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마을 뒤 대덕산에 용바위가 있어 ‘용바우’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한자화하여 용암(龍岩)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본래 해남군 문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문리, 원동리, 용암리와 석교리, 사교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문내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용암마을, 원동마을, 신흥마을, 사교마을, 원문마을, 신월마을, 이목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용암, 원동, 원문이 황일면에, 석교가 황이면에 속한 것으로 나온다. 원동은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삼기원(三岐院)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화원목장(花原牧場)의 원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암마을은 1520년경 장흥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밀양박씨 박대련(朴大連)이 입향조라고 전한다. 원동마을은 1520년경 장흥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밀양박씨 박동길(朴東吉)이 입향조라고 전한다. 사교마을은 1620년경 논산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파평윤씨 윤성식(尹成植)이 입향조라고 전한다. 신월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삼덕포를 간척하여 생긴 간척지에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여러 성씨들이 모여 정착한 마을이라고 한다. 1950년대 가구 수가 줄고 마을 운영 능력이 없어지자 이웃마을인 사교와 합쳐 약 25년 간 사교리 3반에 속하였다. 경제가 좋아지고 젊은 사람들이 늘어 마을 규모가 커지면서 1976년 다시 분리하였다. 원문마을은 1630년경 나주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나주정씨 정관(鄭觀)이 입향조라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인근 옥매광산에서 채굴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호구총수』에 원문리가 나온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주도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던 노동자들이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타고 있던 배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마을 주민 10여 명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목마을도 옥매산 밑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에 옥매산에 있는 옥광산의 옥을 캐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들어선 마을이다. 신흥마을은 원목마을과 한 마을로 있다가 분리된 마을이다.
[자연환경]
북서쪽으로 대덕산[85m], 남서쪽으로 옥매산(玉埋山)[173.9m]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평평한 구릉지 위에 들어섰다.
[현황]
용암리(龍岩里)는 북쪽으로 석교리, 동쪽으로 석교리, 남쪽으로 왕산면 옥동리, 서쪽으로 동외리, 선두리와 접하고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9.021㎢이며, 용암리, 원동리, 사교리, 원문리, 신흥리, 이목리, 신월리의 7개 행정리에 295가구, 594명[남자 294명, 여자 3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 생업은 농업으로 주로 쌀농사를 짓고, 겨울배추와 양파, 고추, 대파 등을 재배하고 있다. 농업용수는 신흥소류지, 분목골저수지, 용암제, 동외리저수지, 삼덕저수지, 원동저수지 등의 물을 이용하고 있다. 용암리 서쪽에서 동남 방향으로 국도 제18호선이 지나고 있다. 우수영에 속한 원문성(轅門城) 터와 영세불망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