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78 |
---|---|
한자 | 別津驛 |
영어공식명칭 | Byeoljin Sta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폐지 시기/일시 | 1896년 1월 - 별진역 폐지 |
---|---|
관할 지역 | 별진역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 |
[정의]
조선시대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에 있었던 역.
[개설]
별진역(別珍驛)은 고려시대에는 승라주도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장흥의 벽사도 역에 소속되었다. 한양으로 향할 때 해남의 남리역에서 맹진을 통하여 별진역에 이른 다음 영암의 영보역으로, 해남의 녹산역에서 옥천면의 영신원을 거쳐 별진역에 이른 다음 영암의 영보역으로 향하는 역이다.
별진역은 지금의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에 있었다. 해남에서 살았던 윤이후(尹爾厚)[1636~1699]의 『지암일기(支菴日記)』에는 별진역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있다. “1692년(숙종 18) 3월 6일 별진 냇가에 당도하자 아내에게 현기증이 있어서 가마에서 내려 쉬었으나 좋아지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별진역으로 묵으러 들어갔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에 도성 한양과 해남과 진도 지방을 연결하기 위한 교통 및 통신 제도로서 별진역을 세웠다. 전통 시대에 역원(驛院)은 원활한 교통과 통신, 여행자를 위한 휴식과 숙식, 이동 수단의 교체와 수리, 정비를 위한 시설로 활용되었다. 역(驛)은 전령(傳令), 사신 영송(使臣迎送)과 같은 공적 업무를 위해 파견되는 관리들의 여행을 위해 관에서 운영하던 기관이었다. 역을 이용하는 관리는 마패(馬牌)를 사용하여 말을 이용하였다. 원(院)은 공무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교통 요지나 험한 곳에 설치되는 보조 시설이었다.
[관련 기록]
『중종실록(中宗實錄)』 1515년(중종 10) 7월에 별진역의 건물을 짓던 중에 별진역의 역녀(驛女) 돌금(乭今)의 자살사건이 발생하였다. 돌금은 전 참봉(參奉) 박성림(朴成林)의 첩으로서 절개를 지키고 살았는데, 별진역의 원(院)을 건설하고 있던 승려 지호(智浩)가 간통하고자 자주 왕래하며 공갈 협박하므로, 돌금이 도망쳤으나 끝내 막기 어려움을 알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곧은 절개가 가상스러우므로 관에서는 매장할 기구를 지급하고 이를 보고하니 임금은 전라감사에게 지호를 잡아다 치죄할 것을 명하였다[海南縣 別珍驛女石乙今, 以前參奉朴成林棄妾, 守信居生。院造成僧人智浩欲通奸, 頻數往來, 恐嚇侵逼, 石乙今逃寄他家, 多般避之, 知其寡弱, 終難拒却, 自縊致死, 其貞信可嘉。 故官給埋葬之具矣。傳曰: 以奴殺其主; 以子歐打其母, 皆是大變。令其道已下去敬差官推之 又傳曰: 驛女石乙今之事, 啓下該曹, 則自當爲之, 但其僧人智浩, 必推無疑, 而監司書狀內, 無現推之意, 當捕而痛治, 可也。其以此意, 諭其道監司].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515년에 나라에서는 정문을 세워 주었다.
[내용]
별진역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현의 북쪽 30리[약 11.78㎞]에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에 해당한다. 성진의 본래 이름이 별진이었고 여기에 별진역이 설치되었다. 별진마을 앞을 통과하는 냇가의 벼랑에서 별 음을 따오고, 서쪽에서 바닷물이 들어오는 별진포(別津浦) 나루가 있어 별나루 또는 별나리[別津]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성진(星津)으로 한자화되었다.
『여지도서』 역원 조에 별진역에 관한 기록이 확인된다. “별진역에 편성된 관리는 10명, 남종 20명, 말 10필이 있었다. 그리고 벽사역에 속하였다[別珍驛在縣北三十里 吏十 奴二十 馬十匹 俱屬碧沙驛].” 이와 관련하여 성진리에는 원터, 창터, 역가래 등 지명과 별진마을 앞 비석동의 비석들이 전한다.
[변천]
별진역은 고려시대 22개 역도(驛道) 중의 하나인 승라주도(昇羅州道)에 속했다. 승라주도는 오늘날 순천과 나주 인근의 역도를 말한다. 승라주도에는 30개소의 역이 편성되었고, 나주의 청암역(靑巖驛)에서 관할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 조에 별진역은 벽사도(碧沙道)에서 관할하는 9개 역 중의 하나로 재편되었다. 9개 역은 파청(波淸)·진원(鎭原)·통로(通路)·낙신(樂新)·영보(永保)·별진(別珍)·녹산(祿山)·양강(陽江)·가신(可申)이다. 이때 해진군[조선 초기 해남현과 진도군을 합하여 만든 고을이름]에는 녹산역과 별진역 두 곳에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1462년(세조 8) 8월에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었는데, 이때 해남의 별진역은 벽사역(碧沙驛)·진원역(鎭原驛)·통로역(通路驛)·녹산역(祿山驛)·가신역(可申驛)·파청역(波淸驛)·양강역(陽江驛)·낙승역(樂昇驛) 등 10역과 함께 벽사도(碧沙道)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벽사도 역승(驛丞)[종 9품]의 관할 아래 편성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별진역도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별진역은 조선 시대에 한양과 해남과 진도 지방을 연결하던 역으로, 해남의 남리역과 녹산역에서 영암의 영보역 간을 연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