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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010
한자 堤川-四郡江山參僊水石
영어의미역 Landscape Painting Album by Lee Bangun that Possesses the Beauty of Jech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선재

[개설]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 서화첩은 1802~1803년 청풍 부사 안숙(安叔)이 청풍, 제천 등 4군의 명승을 유람하면서 읊은 시문과 화가 기야(箕埜) 이방운(李昉運)[1761~1815]이 그린 그림으로 구성된 서화첩이다. 표제에서 거론된 ‘사군(四郡)’이란 충청북도 내 청풍·제천·단양·영춘을 가리키며, ‘강산(江山)’이란 제천 지역 안에 흩어져 있는 명승들을 말한다. 현재 제천시에 속하는 명승을 그린 그림은 「도화동도(桃花洞圖)」, 「평등석도(平登石圖)」, 「금병산도(錦屛山圖)」, 「의림지도(義林池圖)」, 「수렴도(水簾圖)」 등 다섯 폭이다. 이렇듯 『사군강산삼선수석』은 조선 후기 제천 지역의 생활상과 승경을 감상할 수 있는 서화 유물로서,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국민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군강산삼선수석』 안에 담긴 옛 제천의 모습]

조선 시대 선비들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지필묵을 지닌 채 산수 유람을 떠나서는, 경치 좋은 곳에서 말이나 배를 타고 여가를 즐겼다. 물론 필요한 식량과 물자는 노복들이 이고 지고 뒤따랐다. 그런 조선 시대 선비들이 명승지로 손꼽은 곳 중 하나가 남한강 상류에 있는 청풍선부(淸風仙府)다.

『사군강산삼선수석』을 보면 청풍 부사 안숙은 먼저 옛 한벽루에 올라가 청풍강 건너에 있는 금병산의 원경을 음미한 다음 청풍대교 부근 강류 안에 솟은 평등석 암반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음주 정취도 즐기고, 다시 신선이 노닌다는 도화동 계곡을 거쳐 옥순봉을 향해 가면서 주변의 경승에 도취했다. 청풍강 완상을 마친 후 말이나 도보로 멀리 떨어진 월악산 자락에 위치한 수렴폭포의 장관도 감상했으며, 며칠 후에는 제천의 의림지를 유람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산수 기행을 안숙은 『사군강산삼선수석』 제3면 시문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경경부유유(耿耿復悠悠)[잠 못 이루다가 다시 한가해져서]

와유대보유(臥遊代步遊)[누워 노니다 또 걸어서 유람하네]

계장수휴게(溪杖雖休憩)[시냇가에서 지팡이 짚고 쉬기도 하며]

강주차순류(江舟且順流)[물 위로 배 타고 흘러가기도 한다네]

금서태후지(琴書駄後至)[거문고와 책 실은 짐 뒤따르게 하고]

주식재동류(酒食載同留)[술과 음식도 함께 실었노라]

불필분로일(不必分勞逸)[수고로움과 편안함을 구분할 필요 없으니]

청광송일추(淸狂送一秋)[청아하고 탈속한 사람이 가을을 보내는 모습이네]

이렇듯 명승지를 유람한 면면을 화첩의 그림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도화동도」

도화동은 청풍에 위치한 승경으로 청풍대교에서 동쪽으로 2.5㎞쯤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 전기 정인지(鄭麟趾)[1396~1478]가 “도화마을 길은 신선 노니는 곳이요, 단풍든 계곡과 산은 비단으로 수놓은 병풍 같네![桃花村路神仙境, 楓葉溪山錦繡屛]”라고 읊어 도화동의 풍광을 세상에 알렸다.

『제천군지』에서는 “도화동천(桃花洞天)은 청풍면 도화리에 있다. 청풍에서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 동으로 10리쯤 위에 금수산의 무성한 녹음이 앞에 가로질러 흐르는 파강(巴江)[청풍강]의 유유한 물줄기에 잠겨 거꾸로 춤을 추어 굼실거리고, 산수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서 그대로 미의 상징이요 별세계다. ……도화리를 예부터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부른다.”라고 했다. 또, 청풍부사 오도일(吳道一)[1645~1703]이 새긴 ‘취적대(吹笛臺)·와선대(臥仙坮)’와 1807년(순조 7) 부사 이계원(李啓遠)이 새긴 ‘도화동천(桃花洞天) 제일강산(第一江山)’이란 명각(銘刻) 유래와 함께 도화동의 경승을 소개하였다.

이방운은 근경에 청풍강 변을 배치하고 그 뒤로 굽이굽이 펼쳐진 산들과 길쭉하게 솟아오른 소나무들 사이로 평화로운 산촌 마을을 그리고 있는데, 마을 입구에 도롱이를 쓴 채 소를 타고 도화동으로 들어가는 농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근처의 풍경은 험준한 산은 아니지만 나지막한 구릉형의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으며, 화면 중앙에 있는 근경의 산들을 원경의 산보다 진하게 채색하여 원근감을 주고 있는 한 폭의 전형적인 조선 후기 산수화다. 고금에 걸쳐 모든 사람의 마음에 그리는 복숭아꽃 피는 이상향이 바로 이 그림 속 도화동이리라.

2. 「평등석도」

이방운은 청풍강 강류의 중심에 위치한 평등석에 올라가서 모임을 즐기는 선비들과 여기에 사용되는 물자를 나르는 나룻배를 묘사하고 있다. 그림에서 넓게 펼쳐진 강 한가운데 솟구쳐 나온 평등석들이 구불구불한 선묘(線描)로 강물과 닿는 부분까지 그려져 있어, 마치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널찍한 반석 위에서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경승을 음미하는 주변에 배가 두둥실 떠 있는 모습이 낭만적이다.

다섯 개의 커다란 암반 위에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먼저 근경의 나룻배에는 술상을 차리는 주모(酒母)와 배의 후미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의 모습 등 놀이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이 그려졌다. 나룻배 주변의 세 개의 커다란 암반 위에는 취중 한담하는 선비 옆에 술병을 크게 그려 음주 정취를 부각시킨 모습과 취흥(醉興)에 빠져 지필묵으로 시를 쓰는 모습, 주안상을 사이에 놓고 대작하는 모습과 두 손에 술병을 들고 한잔 하자고 권하는 듯한 모습 등을 그려 음주 작시(飮酒 作詩)가 당시 선비들의 유람에 필수 요소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산 쪽 방향으로 위치한 두 개의 암반 위에는 선비가 경사지에 앉아서 시종에게 설명을 듣는 모습과 서서 금수산의 원경을 조망하는 모습, 또 다른 둥근 바위에 앉아서 산수 경치를 음미하고 사색하는 모습이 한가로운데, 이들은 술보다 산수 경관에 관심을 가진 선비들이리라. 멀리 보이는 산들의 표현도 앞 「도화동도」의 산 모습과 같이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세밀한 필치로 간결하게 표현하였지만, 조선 시대 아취(雅趣)를 즐기는 선비들의 놀이 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3. 「금병산도」

관아와 누각으로 유명한 청풍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청풍 부사 안숙이 관아의 모습을 서화첩 시문에서

벽읍관원주사기(僻邑官員做事奇)[궁벽한 고을에 근무하는 관원들은 기발한 일 좋아하여]

독서여가조사수(讀書餘暇釣絲垂)[글 읽고 난 뒤 여가에는 낚싯줄 드리우네]

누운명월여생영(樓云明月如生影)[명월이라 부르는 누각(명월루)에는 밝은 달그림자 나타나고]

지즉청풍부대취(地卽淸風不待吹)[땅 이름이 청풍이니 바람 불기를 기다리지 않네]

라고 읊자, 이방운이 멋진 「금병산도」를 그려 화답하였다.

근경에는 바깥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청풍 관아를 동헌과 서헌으로 나누어 그렸다. 관아의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동헌에는 관수헌(觀水軒)과 유명한 한벽루(寒碧樓)가 있는데, 건물 안 대청마루에서 담소하며 글 읽은 관원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안담 너머 서헌(西軒)에는 매월헌(梅月軒)과 객관인 청풍관(淸風館)이 뒤로 보이고, 청풍관의 후미에 2층 누각이 강을 향하여 서 있으며, 또 후면 강 쪽으로 단층 2칸의 건물도 보이는데, 아마도 명월루(明月樓)와 응청각(凝淸閣)이리라.

그림 속 전각들은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부감(俯瞰) 시점으로 그려졌고, 아래 기둥들은 일관된 방향으로 놓여 공간의 깊이를 전달하면서 입체감이 들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관아 모습인 동헌의 전각들이 엄격하고 권위적인 구성인 데 비하여 여기서는 아담하고 운치 있게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아의 앞뜰에서 노니는 한 쌍의 두루미[丹頂鶴]와 사슴, 그리고 쟁기질하는 사람의 그림 등은 부사 안숙의 평화로운 정치적 이상향을 구가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경(中景)에는 청풍호의 강물과 주변의 경치를 그렸는데, 강물을 청색으로 채색하여 잔잔한 느낌을 준다. 청풍강에는 좌우 양 측면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나룻배가 분주히 떠가고, 가운데에는 선유(船遊)하는 선비들이 탄 돛단배 주위에 두 마리의 백로가 생동감을 더해 준다. 또 강변의 모랫길에 말을 타고 가는 선비와 소를 몰고 오는 평민들의 삶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원경에는 옛 청풍 관아에서 동북 방향으로 강 건너에 위치한 금병산을 평행으로 펼쳐서 그렸다. 병풍처럼 둘러친 금병산의 각진 암석과 산등성이를 층층이 그려 놓았으며, 적색과 황색으로 채색된 나뭇잎들이 단풍 든 가을 풍경임을 알려 준다. 전체가 3단 구도로 잘 짜여진 그림으로 당시의 청풍 관아와 주변 풍경을 핍진하게 보여 주는 산수화다.

4. 「의림지도(義林池圖)」

의림지는 삼국 시대 축조되었다고 전하는 유서 깊은 저수지다. 안숙은 의림지를 방문하는 과정을 “[1802년] 9월 초 아흐렛날 지필묵을 준비한 채 유람 떠났어라. 제천현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10리쯤 되는 곳에 큰 못이 있네. 의림지는 어떤 곳인가? 농경지에 물 댄 공이 이와 같이 크다네[九月初九日 行裝筆墨紙 午飯堤川縣 十里大池水 義林何爲者 灌漑功若是]”라고 하면서 이방운에게 화폭에 담도록 하였으며, 그림 좌측에 칠언율시를 지어 유려한 행서체로 휘호했다.

수란산국석향쇠(水蘭山菊惜香衰)[수란과 산국화 향기 시드는 것 애석하여]

소도연회백경지(小棹沿洄百頃遲)[조그만 배로 넓은 호수를 더디게 배회하네]

자유저애성기국(自有渚涯成器局)[저절로 물가와 제방 형세 이루어졌으니]

수운로한피영휴(誰云澇旱被盈虧)[누가 장마와 가뭄으로 넘치고 줄어든다고 말하는가?]

운단불식원궁처(雲端不識源窮處)[구름 저 멀리 물줄기 시작되는 근원을 알지 못하는데]

학저유간폭시수(壑底惟看瀑始垂)[골짜기 밑에는 폭포수 떨어지는 것만 보일 뿐이네]

고창대제가일곡(高唱大堤歌一曲)[방죽 노래(大堤曲) 한 곡조 크게 부르니]

도어비압각천자(跳魚飛鴨各天姿)[뛰는 물고기와 나는 오리는 자연스런 모습이어라]

이방운의 그림에서 의림지는 탁 트인 실제 모습과 달리 네모진 연못[方池]으로 재구성되어 표현되었다. 이는 아마 우리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관과 접목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자(朱子)[1130~1200]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 중 “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네[半畝方塘一鑑開]”에서의 방당(方塘)의 개념이 사각형 모양의 의림지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근경 중앙에는 견마(牽馬)를 잡힌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과 몇몇의 인가와 정자를 그려 놓았으며, 왼편으로는 의림지 못물이 제방을 넘어 홍류천으로 방류되어 흘러내리는 모습, 호면 위에서 낚시하는 어부와 둑에 앉아 호수를 관조하는 선비의 모습에서 200여 년 전의 평화스러운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의림지 못물은 엷게 청색으로 채색하고 담청의 미점(米點)을 찍어 깊이와 명암을 구분하였다. 의림지 위쪽으로 나타나는 산과 못 주변의 소나무와 버드나무 등의 수목 표현에 사용한 담채(淡彩)가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5. 「수렴도(水簾圖)」

덕산면 월악리 산자락에 위치한 신륵사에서 보광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수렴선대(水簾仙臺)가 있다. 『제천·제원사』에서 “신륵사를 지나 500m 오르면 길 좌측 숲 우거진 골짜기에 넓은 바위 위로 물이 흘러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멋진 폭포를 이룬 곳이다.”라고 묘사한 수렴선대가 바로 이방운이 그린 수렴폭포의 배경으로 청풍부에 있던 명승이다. 수렴도 그림의 좌측 상단에 고즈넉이 서 있는 석탑과 암자는 보광암으로,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림의 중앙에 꽉 찬 폭포 모습에서 점선으로 표현된 시원한 물줄기가 마치 발처럼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데, 시선(詩仙) 이백(李白)[701-762])이 중국 여산폭포가 “3천 척을 날아 흘러내린다[飛流直下三千尺]”라고 읊은 운치를 느끼게 한다. 폭포 옆 중간의 넓은 바위에 앉아서 폭포수를 바라보며 더위를 피하는 두 선비의 모습에서 그림 옆에 쓰인 초서체 오언율시를 낭독하고 있는 듯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명유미신(盛名猶未信)[큰 폭포란 소문 아직 믿지 않았는데]

초안의역연(初眼依亦然)[첫눈에 보니 소문 그대로이네]

하하개금석(下下開金石)[아래로 내려가며 금석이 열리면서]

고렴격반천(高簾隔半天)[높은 주렴(폭포수)이 하늘 중간쯤 걸려 있네]

표분주과산(飄分珠顆散)[구슬 같은 물방울들 질풍처럼 흩어지며]

사락옥승연(斜落玉繩連)[하얀 새끼줄(물줄기)이 연달아 비껴 떨어지네]

홀억삼경열(忽憶三庚熱)[홀연 불꽃같은 삼복더위를 생각하면서]

당전로정면(當前露頂眠)[폭포 앞에서 이마를 드러낸 채 자노라]

폭포수 그림 오른쪽 하단에 그려진 세 그루의 낙락장송 밑으로 수렴폭포를 감상하는 동료를 찾아가는 듯한 말 탄 선비의 모습이 여유롭다. 여기서 이방운이 그린 「수렴도」의 배경은 수렴선대이지만, 웅장한 수렴폭포의 모습은 같은 면내 억수리의 수문동 계곡에 있는 석문수렴(石門水簾)[일명 수문동폭포]을 염두에 두고 그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군강산삼선수석』 속 제천과 현재의 제천]

『사군강산삼선수석』에 그려진 그림들은 200여 년 전의 진경산수화이므로 지금의 제천 지역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1985년 충주댐이 조성됨으로써 예전의 평화롭던 모습들은 물속에 잠겨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 먼저 청풍읍내의 옛 관아가 있던 자리가 수몰되면서 한벽루응청각 등의 건물이 청풍면 물태리에 조성된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되었으며, 건너편의 금병산은 태반이 강물에 잠기고 산봉우리의 능선이 쓸쓸히 남아 있어 청풍호 유람선 관광객들만이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현재 청풍대교 부근 청풍강 속에 있던 평등석은 완전히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으며, 도화동도 근래 새로 만든 넓은 포장도로와 주차장 등의 편의 시설로 인하여 신선이 유유자적하던 옛 모습의 운치가 반감되었다. 의림지이방운이 그림을 그린이후 제방 위에 영호정(暎湖亭)경호루(鏡湖樓) 등의 아담한 건축물들이 추가로 세워져 호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수렴선대는 폭포수가 흘러 내려오는 상단에 다리를 설치하고 소로를 만들어 주변의 자연환경이 훼손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엿볼 수 없다.

[『사군강산삼선수석』이 남긴 의미]

『사군강산삼선수석』 속의 느리지만 유유자적하는 옛 모습과 빠르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 모습들을 비교해 보면 보존과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200여 년 전 제천과 청풍 지역의 명승과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서화첩을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렇듯 19세기 초 명승을 기행(紀行)하고 이를 사경(寫景)하는 관습의 결과물인 서화첩 『사군강산삼선수석』은 현대화로 많은 것이 변모된 제천 지역의 아름다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자료이자, 후손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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