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
○ 왕해(王諧) : 부사리(副使吏)가 되어 백성들의 마음을 두려워하더니 동도유수(東都留守)로 옮아가게 되자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더 머물기를 원하다가 드디어 조정에 간곡히 빌어 말하기를 “우리의 왕군(王君)을 일 년만 더 머물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로 인해 옛 관직으로 회복되었는데 성품이 굳세고 바르며 청렴결백하여 모든 계획하는 바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는...
-
○ 하경휘(河鏡輝) : 자는 공곽(公廓)이요, 호는 매헌(梅軒)이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기축년(선조 22년, 1589)에 사마시에 올랐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어기지 않았다. 임진란 때 환성공(喚醒公)이 상주성(尙州城)으로 달려가는데 겨우 북문에 이르러 적병이 갑자기 닥쳤다. “여기가 나의 죽을 곳이다. 너는 빨리 나가...
-
○ 남원양씨(南原梁氏) : 효열부(孝烈婦). 승의랑(承義郞) 진양(晉陽) 강수제(姜壽齊)의 아내요, 찰방(察訪) 양장(梁樟)의 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이 15세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넣어서 소생할 수 있었다.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지아비가 죽자 양씨가 이르기를 “내가 지하로 따르고자 하나 차...
-
○ 양역(梁嶧) : 호는 운곡(雲谷)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셋째 아들이다. 기유년(세종 11년, 1429)에 사마시에 합격해 연일진병마첨절제사(延日鎭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가 뜻이 멀고 행실이 높아서 안과 밖에서 추중(推重)되었다. 단성(丹城)으로부터 진주 운곡(雲谷)에 옮겨와서 살았다. ○ 하공효(河...
-
근대의 유학자 박태형의 문집. 박태형(朴泰亨)[1864~1925]의 휘는 태충(泰充)이며 자는 문행(文幸), 태정(泰亭), 윤상(允常)이고 호는 간암(艮嵒)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아버지 박덕성(朴德成)과 어머니 진양강씨(晋陽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고종 때의 문신인 송병선(宋秉璿)[1836~1905]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글을 수합한 『간암문집』은 11권...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찬지(贊智).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이 강의회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섬길 때 뜻을 받들고 몸을 편안하게 하였다. 부모가 병드니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똥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으며, 허벅지를 잘라 피를 내어 약에 섞기도 하였다. 고종(高...
-
·임천서원(臨川書院) : 관방마을 중앙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조 숙종 28년(1702)에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웅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州) 하증(河憎),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혁파로 훼철되었다가 1937년에 복원되었다. 임천서원에 배향된 이준민은...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광주노씨는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리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또한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독하자 밤낮으로 하늘에 쾌유를 빌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는 등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간병하였다. 이 일에 감복한 향리가 조정에 보고하여 고종 조에...
-
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국제적 범죄를 자행한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조되고 있을 때 일본의 지원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이 11월 15일 고종의 조칙으로 단발령을 실시한다고 선포하였다.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
인간의 육체를 표현매체로 삼아 사상·감정·감각·정서 등을 율동적으로 표출하는 행위. 무용에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시와 음악은 시간과, 회화와 조각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차이를 보다 확실히 할 수 있다. 발레처럼 공간의 패턴이 중심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탭댄스처럼 시간적 리듬이 중시되는 것도 있다. 따라서 여러 예술 분야 중에서도 무용이 갖고...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초계(草溪).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병조판서에 추증된 변연수(卞延壽)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으며,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 휘하에서 왜선을 격파하여 군공을 세웠다. 이어서 당포해전(唐浦海戰)에도 참전하여 분전하였으나 아버지 변연수와 함께 전사하였다....
-
조선 전기의 열녀. 변립(卞岦)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때 남편 변립이 그의 아버지 변연수(卞延壽)가 일으킨 의병을 따라 이순신 장군의 진으로 가서 군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당포싸움에서 부자가 모두 전사하자, 이를 안 김씨는 그 날로 자결하여 남편을 따랐다. 고종 때 이 일이 알려져 정려를 세우게 하고, 숙부인을 추증하였다. 아버지는 나라에 죽고, 아들은 아버지에 죽고, 아내는...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오원(吾元). 변남룡(卞南龍)의 5대손이다. 1538년(중종 33) 출생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사할 때까지 대의를 위하여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변훈남(邊勳男)에게서 수학하였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마한 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
-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지도로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으로, 1919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전개되었다. 연 집회횟수 1542회, 집회 참여인원 200여 만명을 기록하며 평화적 시위를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명, 피검...
-
조선 말기의 의병장. 경상남도 양산(梁山) 출생으로, 원래 의원으로서 고향에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양위(讓位)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진 직후인 1907년 12월 임진강·한탄강 유역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장 허위(許蔿) 휘하에 들어갔다. 1907년 12월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받고 해...
-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의 공동목적으로 석재나 흙 등을 이용하여 축조한 전통건조물. 성은 흔히 성곽이라는 말과 혼용되고 있는데 성곽은 내성과 외성을 전부 일컫는 말이며 목책류의 결구로 해로운 동물이나 척을 방어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아군에게 유리한 지리를 얻고 적군을 불리한 조건하에 접근시키려는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다. 그러나 성의 축조는 군사적인 목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
절개가 높은 여자. 열녀는 일반적으로 위난을 당하여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하거나 남편을 위해 헌신한 여인을 일컬으며, 열부(烈婦)나 절부(節婦)를 통칭한다. 열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과부가 되면 마땅히 수절을 하여야 하고, 위난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키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로서 정착된 것은...
-
고려 전기의 문신. 예빈경을 지낸 왕유(王惟)의 아들이다.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승진하여 감찰어사가 되어 원칙대로 법을 집행하여 칭송을 받았다. 뒤에 진주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어 경주로 전임하게 되었으나 진주 백성들의 청으로 1년을 더 유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였을 뿐 아니라 절도가 있었으므로 모든 일을 백성에게 이롭게 하였다....
-
경상남도 진주시에 소재하는 유교적 신념을 공동체적으로 구현하는 단체. 조선조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가르침과 덕목이 일상생활 속에 파고 들어와서 생활화 되었다. 인간의 삶을 규율하는 온갖 형식과 규범치고 유교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유교단체란 유교적 교리에 바탕을 둔 각종 단체로 볼 수 있으며,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을...
-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판소리 교육에 힘쓴 판소리의 명창. 유성준은 1874년 전라남도 구례(求禮)에서 태어났는데, 전라북도 남원(南原)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진주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에 세상을 떠났다. 젊어서 송우룡(宋雨龍)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고, 한때 정춘풍(鄭春風)과 김세종(金世宗)에게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판소리 이론으로 첫손을 꼽던 명창 김세종에게...
-
근대 개항기의 문신, 의병. 조선 1860년(철종 11) 서울에서 태어나 1889년(고종 26)부터 3년간 선전관 벼슬을 지냈다. 이 무렵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자 벼슬을 버리고 국권 회복을 꾀하던 중 1906년 고종으로부터 밀지를 받고 의병에 투신, 의병장이 되어 육남소모장(六南召募將) 칭호를 받았다. 이후 진주에 거주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다. 1907년 김동신(...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파평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잘 섬겼다. 아버지가 종기로 수개월 동안 자리에 누워 있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꿩과 올빼미 등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올렸다. 부모가 천수를 다하여 세상을 떠나니 상중에도 슬퍼했으며,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성묘를 폐하지...
-
나라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민중이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조직하는 자위군.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외침을 많이 받아 고려·조선 시대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양란의 의병과 조선 말기의 의병...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었던 서원. 조선 숙종 28년(1702)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州) 하증(河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등 다섯 분의 학문과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창건하였다. 그 가운데 하증은 어머니 진주강씨 부인이 왜놈에게 항절하다 죽음을 당하였기 때...
-
조선 말기의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경상북도 상주 출신. 장용상(張龍相)의 아들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군 내동면 동곽리에서 태어났다. 장지연은 일찍이 장석봉(張錫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진사...
-
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인 이도(李棹)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이도의 초명은 치(齒)이며 시호는 성절(聖節)이다. 본래 공주에 세거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금강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강을 건너게 했다. 그래서 태조로부터 도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통합삼한개국익찬(統合三韓...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 출신으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 본관은 진양(晋陽). 1822년 10월 13일 아버지 정서곤과 어머니 울산 김씨(金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안토니오이다. 1822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정찬문은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닌 인물로 전해진다. 정찬문은 천주교 신자 집안...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군성(君聖).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들매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상을 당해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들에 불이 나서 온 골짜기가 다 타고 묘소와 여막까지 불에 탈 위기에 처했으나 돌연 바람이 둘러져서 불이 저절로 꺼졌다 한다. 고종 때 정려(旌閭)되었으며,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
-
진주지역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조선 초기에 진주에는 강씨·하씨·정씨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이성계는 진주 사정을 잘 아는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시켜 이곳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무학대사가 내려와 진주성에서 대봉산(大鳳山) 쪽을 바라보니 천하의 명당 자리였다. 대봉산은 “큰 봉황새가 사는 뫼”란 뜻인데, 무학대사는 이 산이 있기 때문에 진주에서 인물이 많이...
-
경상남도 진주시 청곡사 소재의 불법을 수호하는 신상. 청곡사의 금강역사상은 업경전(業鏡殿) 안에 있는데, 중생이 생전에 쌓은 업(業)을 심판하는 명부시왕(冥府十王)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2구의 금강역사상은 크기가 약간 다르다. 왼쪽은 총 높이 210㎝, 어깨너비 80㎝, 대좌 너비 92㎝이고, 오른쪽은 총 높이 220㎝, 어깨 너비 75㎝, 대좌 너비 85㎝이다. 대형 통나무에...
-
진주지방에 전하여 내려오는 칼춤으로서 중요무형문화제 제12호(1967년 1월 16일 지정)인 진주검무는 검기무(劍器舞)라고도 하는데, 교방춤의 하나로서 우아하고 화려한 장단과 춤사위를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궁중계열의 무용 중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춤. 검무는 서기 660년경 신라시대에 발생된 춤으로, 고려 말까지 가면을 쓰고 연출되었는데,...
-
진주 지방의 교방에서 추어지던 춤. 진주교방굿거리춤은 ‘기방굿거리’, ‘굿거리춤’, ‘수건춤’, ‘입춤’으로도 불리는 춤으로 주로 3분박 4박자에 맞추어 춘다. 고려 문종 때 들어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1900년대 이후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승무와 더불어 여기(女妓)들에 의해 교방에서 예술적으로 다듬어졌다. 고종 황제 때 여기(女妓)로 활동했던 최완자가 1940년대부터 당대 명...
-
기녀(妓女)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인 진주교방(晋州敎坊)을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 진주의 교방예술은 진주교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교방은 고려·조선시대 기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이다. 교방청(敎坊廳)은 본래 중국 당나라 때 궁중 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관기들과 악공들에게 가무악(歌舞樂)을 가르쳤다. 이러한 중국 교방의 전통은 우리나라...
-
경상남도 진주 지방의 교방에서 추어지던 일종의 놀이춤. 원래 「포구락무」는 궁중에서 행했던 춤과 노래 중 하나로 공을 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를 표현한 것이다. 진주포구락무는 채구(彩毬)를 구문(毬門)의 풍류안(風流眼)에 던져 넣는 놀이를 음악과 무용으로 형상화한 궁중정재가 진주권번에서 지역화 된 춤으로서 고종[재위 1863~1907] 때 진주부사를 지냈던 정현석의 『교방가요』에서...
-
조선시대 지수면 청원리에 건축했던 사당. 이 사당의 소재지는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이며, 조선시대에 건축되었던 사당이었으며, 고종시에 철폐되어 현재 복건사업이 진행 중이고, 비석이 남아있다. 성종시의 명신인 홍문관 부제학 이관재와 그 후손인 행와 행정을 배향하여 제사지내던 사당으로 조선시대에 건축되었다. 그 후 고종시에 이 사당이 철폐되었는데, 후손인 이기환이 이 사실을 안...
-
조선 후기의 효자 추성원(秋成元)의 표창을 상신하고 답을 받은 문서. 추성원은 조선 후기 순조와 고종 때의 효자이다. 12~13살 때 부친 추민중(秋敏中)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 드렸고, 어머니 창원황씨가 병마에 고통당하자 산중을 헤매며 약초를 캐어 탕을 지어 올리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하동과 곤양 주민들 서른 명이 천하에 둘도...
-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신은 전통시대의 사상을 포괄하여 내려오는 용어이지만, 나라에 충성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기본적 덕목이다. 이러한 충성심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후세의 칭송을 받고 있는 충신들은 그 마음이 항상 나라와 임금, 그리고 겨레를 위하는 일념에 차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개인의 영달이나 어느 한 집단의 권력 쟁취를 위하여 공을...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찬언(贊彦), 호는 행정(杏亭)이다. 생원 하락(河洛)의 현손이며, 하재악(河載岳)의 아들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9세 때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조희맹(趙希孟)에게 수학하다가 19세 때 스승에게 울면서 어머니 봉양을 위해 돌아갈 것을 고하고 돌아와서는 50년 동안 하루같이 노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활동한 한국화가. 부친은 사근도 찰방을 지낸 황희연(黃喜淵)이다. 1881년에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와 경상남도 고성군의 경계에 있는 새티고개에서 출생한 황영두는 10세에 사랑에 머물던 과객이 묵화를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을 시작하여 천재적인 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고종의 부름을 받고 어전에서 그림을 그려 칭송과 상을 받았으며, 궁정화방에 머물면서 이당 김은호와...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운선(雲善). 통정대부 황계량(黃桂亮)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삯일을 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3년간을 자리에 눕게 되자 지성을 다하여 약을 달이고 하늘과 산신에 빌었다. 그가 약을 구해 밤중에 산길을 오는데, 그의 효심에 호랑이도 감동하였는지 그를 지켜주었으며, 의원집에 가도 사나운 개가 꼬리를 치며 반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