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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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理志 |
영어공식명칭 | Jirij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한신 |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서술한 책.
[개설]
조선 시대의 지리지(地理志)는 조선 시대사에서 사회사, 경제사, 군사사, 군제사 등에서 매우 긴요한 자료이다. 지리지는 조선 전역의 정합적(整合的)인 통치를 위해 지세(地勢), 교통, 토산(土産), 인물 등에 관한 정보를 종합하여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인문·지리 정보의 집적화·체계화는 현대에 와서 지리지를 제작할 당시의 해당 지역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시기별로 작성된 기록은 통시적인 흐름을 보여 지역의 변화상을 좀 더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역사학뿐 아니라 인류학이라는 차원에서도 조선 시대 지리지는 귀중한 자료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는 오늘날의 남양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양주(楊州)를 도호부(都護府) 단위로 다루었다. 연혁을 고구려 남평양성(南平壤城)이었다가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와서 지명을 양주로 정하여 996년(성종 14)에 해주 우신책군 절도사(海州右神策軍節度使)와 더불어 양주 좌신책군 절도사(楊州左神策軍節度使)를 두어 개경의 이보(二輔)로 삼았다는 내용을 서술하였다. 양주에 건원릉(健元陵)이 있다는 사실을 기술하였고, 주요한 지리적 특징으로 삼각산·오봉산·천보산·소요산(逍遙山)·양진(楊津)을 들었다. 양주의 교통 시설로서는 6역(驛)을 언급하였는데,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迎曙)·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雙樹)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파악한 호수(戶數)는 1,481호, 인구는 2,726명이었다. 그중 선발한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 133명과 선군(船軍) 132명으로 기술되었다. 세종 대에 관할 지역은 도호부(都護府)로서 원평(原平)이었고, 현(縣)으로서는 고양(高陽)·교하(交河)·임진(臨津)·적성(積城)·포천(抱川)·가평(加平)을 포함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오늘날의 남양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양주를 목(牧) 단위로 다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기술한 양주의 주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양주의 범위를 설명하였다는 점이다. 이를 동서남북의 사방(四方)으로 살펴보면 동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25리 또는 22리, 가평현 경계까지는 29리, 광주부(廣州府) 경계까지 75리라고 하였다. 남쪽으로는 광주부 경계까지 67리 또는 82리라고 하였다. 서쪽으로는 고양군 경계까지 40리, 파주(坡州) 경계까지 33리로 기술하였다. 북으로는 적성현 경계까지 22리,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58리,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74리로 획정하였다. 연혁은 본래 고구려 매성군(買省郡)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태조 대에 양주지사(楊州知事)를 두었다가, 다시 승격하여 부(府)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후 태종 대인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고쳤다가, 세조 대인 1466년(세조 12)에 승격하여 목으로 만들고 진(鎭)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을 정리하였다. 담당하는 관원으로 목사(牧使) 1인·교수(敎授) 1인으로 기술하였다. 지리적 특징으로 불곡산(佛谷山), 삼각산, 도봉산(道峯山), 불암산(佛巖山), 아차산(峩嵯山), 수락산(水落山), 주엽산(注葉山), 천마산(天馬山), 천보산(天寶山), 소요산, 묘적산(妙寂山), 왕방산(王方山), 고령산(高嶺山), 갈립산(葛立山), 금대산(金臺山), 검암산(儉巖山), 홍복산(弘福山), 소라산(所羅山), 차유령(車踰嶺), 벽석령(碧石嶺), 석문령(石門嶺) 등을 제시하여 『세종실록』「지리지」보다 지리적 환경을 상세하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양주의 교통 시설로는 역뿐 아니라 원(院)까지도 함께 기록하였다. 그중 역은 영서역(迎曙驛)과 그 속역인 벽제(碧蹄)·마산(馬山)·동파(東坡)·청교(靑郊)·준예(狻猊)·중련(中連), 평구역(平丘驛)과 그 속역인 녹양(綠揚)·안기(安奇)·양문(梁文)·봉안(奉安)·오빈(娛賓)·쌍수(雙樹)·전곡(田谷)·백동(白冬)·구곡(仇谷)·감천(甘泉)·연동(連洞), 녹양역, 쌍수역이다. 원은 광제원(廣濟院), 광인원(廣仁院), 상지원(相知院), 도공원(陶孔院), 덕해원(德海院)을 들어 역과 원의 분포를 상세히 전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호수와 인구, 군역(軍役) 동원 상황에 관한 보고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대동지지』]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인조 대에 양주에 수어중영(守禦中營)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속읍(屬邑)으로 양주, 양근(楊根), 가평, 포천, 영평(永平), 지평(砥平) 등을 소개하였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관방에 관한 항목을 발견할 수 있는데, 양주의 주요 관방 시설로 양진성(楊津城), 대모성(大母城), 수철성(水鐵城), 중흥동고성(重興洞古城), 아차산고성(峩嵯山古城), 풍양고성(豐壤古城), 검암산고루(儉巖山古壘) 등을 들었다. 특히 검암산고루는 조선 선조 대 장수였던 고언백이 의병장으로서 쌓았다는 세주(細註)를 부기하였다. 왕실의 능침도 대거 정리되어 있다. 정능, 사능(思陵), 온릉(溫陵), 태능(泰陵), 강릉(康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의릉(懿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 등을 제시하고, 능의 주요 인물과 관리 인력·기일 등을 정리하였다. 양주의 대표적인 사우(祀宇)로는 도봉서원과 석실서원을 기록하고 이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더하였다.
[『여지도서』]
17세기 이후 지리지에서는 인민의 호수와 동원 가능한 부세(賦稅)를 이전보다 상세하게 파악해 두었다. 18세기 영조 대에 편찬한 『여지도서(與地圖書)』에서는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과 경기도 광주군의 총 호수를 3,908호로 파악하였고, 인구는 남자 8,371명·여자 9,773명·합계 18,144명으로 파악하였다. 이후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경기지』와 『경기읍지』에서는 양주의 호수가 12,251호 인구는 남자 30,236명·여자 30,126명으로 기록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호구 및 인구 증가 요인은 지리적으로 한성과 인접하여 교통이 발달하고, 상품 유통 경제가 활성화되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경기도 남양주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 일부는 누원점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고, 일부는 채소·과일 등을 재배하는 상업적 농업에 종사하여 소득을 높였다.
생산의 주요한 터전이었던 농지에 관해서도 지리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초기 양주의 토지 결수는 1만 5190결로 대부분 개간한 간전(墾田)이었다. 여기서 수전(水田)은 총 결수의 30%인 5,063결로 비옥한 편이었다. 이러한 토지 결수는 『여지도서』에서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한전 7,963여 결로 나타나고, 수답(水沓)은 2,199여 결이었다. 따라서 원장부의 전답은 모두 1만 160여 결이었지만 실제로는 3,013여 결이 생산에 활용되었다. 경기도 양주의 세미(稅米)와 세태(稅太)는 영원히 감면하되 봄·가을로 1결당 미(米) 6두를 거두어 아록(衙祿), 공수(公須) 등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저치미 항목으로 돌렸다. 세미, 세태 등을 감면 받았던 까닭은 양주 지역에 능침이 많아 조정에서 전세를 수시로 탕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주요한 세 부담 중 하나가 공물(貢物)이었다. 조선 전기 이래로 공물 납부가 차츰 부담과 폐단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납을 전세화하여 해당 공물을 미곡으로 징수하는 제도로서 대동법을 마련하였다. 대동법에서는 공물을 부과하는 대신 대체로 1결당 12말씩 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민(民)이 부담한 공물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지리지를 통해 대체적인 물품을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명주·삼베·잣·옥돌·송이버섯·은어 등이 기록되었고, 『여지도서』에서는 파·토끼·돼지·꿀 등이 기록되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경기도 양주 및 광주 지역에서는 한성과 인접한 조건과 관련하여 채소, 가축 등이 부담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환곡 역시 당대에 대민(對民) 진휼책이기도 하면서 재정의 일부로 활용된 제도였다. 특히 경기도 지역에서의 환곡 운용 제도가 재정 운용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기도 양주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지도서』에서는 양주의 환곡이 각 창고에 있는 양을 합하면 약 2만 7155석 7두 7승이었다. 해당 관서에서는 연말부터 창고를 열어 보리를 수확하기 전까지 곡식을 대여하였다가 가을부터 겨울 창고를 봉할 때까지 대여한 곡식을 거두어 들였고, 그 양은 농사의 풍흉에 따라 일정하지 않고 차이가 있었다.
조선 후기 정부에서는 인민을 토지에 긴박(緊縛)하는 외에 군역(軍役)의 부담을 지워 전국의 방어 체제에 편입시켰다. 조선 시대에 경기도 양주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광해군 대 사헌부에서는 경기도 양주가 한성을 지탱하는 세 지역 중 하나이며, 지역이 넓고 사람이 많아 이에 걸맞은 수령을 선정·임명할 것을 건의하였다. 인조 대 총융사 이서는 경기 군사를 점열한 뒤 경기도 양주에 소속된 7개 고을의 정군은 308명, 속오군은 1,292명, 별대마군은 184명으로 파악하고 각 부의 부대 단위에 보충 병력을 차출하여 보냈다. 경기도 양주는 본래 총융청 소속이었다가 효종 대에 이르러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부대로 이속되었다. 그 후 정조 대에는 경기도 양주에 방어영을 설치하는 문제로 여러 차례가 논의가 있었다. 이러한 경기도 양주를 방어하는 병력이 시기별로 얼마 정도였는지를 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에서는 경기도 양주 지역의 마병과 보병을 합하여 9,668명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비변사등록』을 살펴볼 수 있는데, 1732년(영조 8) 경기도 양주의 호수가 1만 76호이며, 이 중 각 아문에 소속된 것이 9,000여 호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점은 막중한 능역이나 행행(幸行)할 때 응역하는 호는 1,700여 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이에 관한 대책과 결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양주읍지』]
『양주읍지(楊州邑誌)』는 1899년에 편찬되었다. 1책으로 되어 있고 필사본이며 지도가 첨부되었다. 내용 구성은 연혁(沿革), 방리(坊里), 결총(結摠), 호구(戶口), 환총(還摠), 역도(驛賭), 풍속(風俗), 고적(古蹟), 토산(土産), 인물(人物), 충효열(忠孝烈), 명환(名宦), 능침(陵寢), 사찰(寺刹), 봉수(烽燧), 산천명승(山川名勝), 제영(題詠), 선생안(先生案) 등으로 되어 있다. 다른 양주 지리지에 비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선생안조에 384명의 읍쉬명단(邑倅名單)을 열거하였다는 것이다. 권말에 군수 조정구(趙鼎九)의 지기(識記)가 있다.
[『양주군읍지』]
한편 오늘날의 남양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양주를 기록한 읍지로서 『양주군읍지(楊州郡邑誌)』도 있다. 저본은 확실하지 않으나 19세기 중반 또는 광무 연간, 즉 1897~1907년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1842~1843년에 만들어진 『경기지(京畿誌)』의 「양주읍지(楊州邑誌)」와 체제와 내용이 거의 유사한 것에 근거하며, 전부(田賦)·군액(軍額)·조적(糶糴)·공해(公廨) 조의 각 창의 조적 관계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위와 같이 각각의 지리지에서는 현대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와 광주 지역의 지리·형세·지역의 특징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당대 경기도 양주 지역 일대에 거주하며 생산하는 인민의 삶을 환곡·공물·생산물 등에 관한 기록을 통해 거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