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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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弼奎 |
영어음역 | Son Pilgyu |
이칭/별칭 | 반암(盤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남산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시경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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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남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870년 7월 20일 |
몰년 | 1938년 8월 15일 |
[정의]
일제강점기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손필규는 1870년 7월 20일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남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천도교인으로 진보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고,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는 천도교를 발판삼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2년 서울에서 49일 동안 국운 회복 기도를 드렸고, 1918년에는 손병희 산하에서 있으면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힘썼다. 또한 천도교 은진 교구장과 논산군 교구장을 역임하며 관내 교인들을 통해 관할 지역의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1919년 김태오·이백순·이근옥 등과 논산읍내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하고, 3월 12일 오후 3시를 기해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학생 백여 명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경에서 논산읍내로 향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당시 시위대 규모는 1천 명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손필규는 진압 당시에는 체포되지 않았으나 밤중에 다시 태극기를 돌리며 시위운동을 계속하다 주동자 수색에 나섰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손필규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천도교 4대 교주 박인호의 지령으로 1938년 실시된 소위 무인년기도사건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다시 일경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된 후 곧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1974년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남산3리에 절의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