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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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災殃-偉大- 藝術,許穆-陟州東海碑 |
이칭/별칭 | 퇴조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미수2길 17[정상동 108-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재홍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61년(현종2) - 척주동해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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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주동해비 - 강원도 삼척시 미수 2길 17[정상동 108-1] |
[정의]
조선시대 후기 문신인 미수허목이 자연재해를 물리치기 위하여 전서체로 글을 써서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에 세운 비석.
[개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강원도 삼척시의 육향산 꼭대기에 있다. 척주동해비는 조선시대 후기 문신인 미수허목이 삼척부사로 와서 글을 짓고 전서체로 글씨를 써서 세운 것이다.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당시 삼척 지역은 자연재해가 극심하였다. 1661년(현종 2) 여름에는 큰비가 내리고 태풍이 불어서 지붕의 기와가 날아가고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뽑히기도 하였으며, 하천이 범람하여 논밭이 수몰되었다. 이 같은 자연재해로 동요하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허목은 동해 바다를 칭송하는 글인 「동해송」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인 미전체로 글을 써서 돌에 새겨 정라도에 비석을 세웠다. 이것이 ‘척주동해비’이다.
척주동해비는 삼척민들에게 단순한 비석 이상의 것이었다. 척주동해비가 건립되고 나서 자연도 이 신비로운 문장과 글씨에 감동되었는지 조수의 피해가 사라졌다. 이에 삼척민들은 조수를 물리친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라 부르게 되었으며, 척주동해비 비문을 소장하면 재액이 없어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이 비문을 집에 소장하거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척주동해비는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지역과 자신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함께 허목도 삼척 사람들 가슴속에 삼척부사를 지낸 한 인간이 아니라 삼척을 지켜 주는 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허목의 생애]
허목(許穆)[1595~1682]은 본관이 양천(陽川), 자(字)는 문보(文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허목은 태어날 때 손바닥에 ‘문(文)’ 자가 새겨져 있어서 자(字)를 스스로 문보(文甫)라고 하였으며, 눈썹이 눈을 덮을 정도로 길어서 호를 ‘눈썹이 긴 늙은이’이라는 의미의 미수로 하였다.
1595년 한양 창선방에서 현감 허교(許喬)[1567~1632]의 삼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난 허목은 1682년(숙종 8)에 천수를 다 누린 8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허목은 당시 최고 벌열(閥閱) 가문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찬성을 지낸 허자(許磁)[1496~1551], 조부는 별제 허강(許橿)[1520~1592], 부는 현감을 지낸 허교이다.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1549~1587]의 딸이다. 임제는 선조 당시 유명한 시인으로, 예조 정랑까지 지내다가 동서분당(東西分黨)을 개탄하여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명산을 주유하다가 요절하였다. 외조부의 이 같은 행적은 허목이 은거하여 학문과 글씨에 몰두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부터 비범함을 보인 허목은 9세에 독서를 하였고, 10세 때 교관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세에 완선군이의전(李義傳)[1568~1647]의 딸이면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1547~1634]의 손녀인 이씨(李氏)와 혼인하였다. 당시 이원익은 허목을 매우 총애하여 “훗날 내 자리에 앉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며 큰 기대를 하였다.
허목은 경기도 광주 지역 우천(牛川)에 있는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였지만 32세 되던 1626년(인조 4)에 박지계 사건으로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허목이 동학재임(東學齋任)으로 있을 때 서인계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1573~1635]가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에 대하여 추숭론을 제기하자 허목은 임금에게 아첨하여 예(禮)를 문란시킨다고 비판하고 그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지웠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허목은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나중에 비록 정거(停擧)가 풀렸지만 과거의 뜻을 버리고 자봉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허목은 1650년(효종 1) 56세에 최초로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됨으로써 늦게 관직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를 곧 사직하고 이듬해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어 효종의 내문(來問)에 응하다가 또다시 이듬해에 사직하고 고향 연천으로 내려갔다. 그 후 63세 되는 해인 1657년(효종 8)에 지평(持平)에 제수됨으로써 관직의 길을 본격 나아가게 되었다. 1659년(효종 10)에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제(服制) 문제로 서인과 대립한 허목은 여기서 패하여 이듬해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허목은 삼척부사로 2년 동안 재임하면서 향약으로 지방 교화에 힘쓰고, 척주지를 편찬하고,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건립하였다. 이후 연천으로 낙향하였다가 1674년(숙종 원년) 제2차 예송(禮訟)에서 남인이 승리하고, 이어서 숙종이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으로 특배되었다. 이듬해에는 성균관 제주(祭酒)가 되었으며, 숙종의 극진한 우대를 받아 1년 만에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임명되는 파격의 영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1679년(숙종 5) 고향 연천으로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몰락한 상태에서 1682년(숙종 8) 88세의 미수(米壽)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지방관으로 펼친 이상]
허목과 삼척의 인연은 허목이 삼척부사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허목은 1차 예송 때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의 대결에서 패배의 쓴잔을 맛보고 1660년(현종 1) 10월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허목은 66세인 현종 원년(1660) 10월에 삼척부사로 임용되어 68세 때인 1662년(현종 3) 8월 도계진상(到界進上)을 빠뜨려서 파직되기까지 약 2년 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였다. 허목은 당쟁에서 서인에게 패배하여 삼척부사로 좌천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이상(理想)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역대 삼척부사 가운데 가장 많은 업적을 남겼다. 패배의 아픔을 이상의 실천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허목은 향교의 제기(祭器)를 새롭게 제작하고, 삼척부에서 거행되는 제사용 제단(祭壇)을 정비하였다. 향약(鄕約)과 이사제(里社制) 실시를 통해서 지방제도를 정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식수(植樹)사업을 전개하는 등 치산치수(治山治水) 사업을 시행하였다. 해마다 반복되는 가뭄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허물어진 저수지를 수축하고 수로를 정비하였다. 이와 함께 1661년(현종 2)에는 죽서루 건너편 황무지에다 소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삼척 최초의 사찬(私撰) 읍지(邑誌)인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였다. 허목이 삼척읍지를 편찬한 것은 삼척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하여 각 고을의 자연 환경, 산업, 주민의 동향, 풍속 등을 파악하여 그 특성에 맞는 통치를 하기 위함이었다.
[예술로 펼친 위민사상, 척주동해비]
허목이 삼척부사로서 남긴 업적 가운데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은 척주동해비의 건립이다.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당시 삼척 지역에는 자연재해가 극심하였다. 1661년(현종 2) 여름에는 큰 가뭄이 든 가운데 5월에 서리가 내려 풀이 말라죽었고, 7월에는 큰 홍수가 났으며, 8월에는 서리가 또 내려서 많은 농작물 피해를 보았다. 특히 7월의 대홍수 때는 큰비가 내리고 태풍이 불어 지붕의 기와가 날아가고,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뽑히기도 하였다. 하천이 범람하여 논밭이 수몰되었으며, 특히 바닷가 쪽 수해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 같은 자연재해로 동요하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허목은 동해 바다를 칭송하는 글인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인 미전체(眉篆體)를 돌에 새겨서 정라도(汀羅島)에 비석을 세웠다. 이것이 척주동해비이다.
척주동해비는 비록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얼마 되지 않아 파괴되었다. 척주동해비가 파손된 것은 풍랑에 의해 깨져서 바다에 가라앉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비석 이웃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비석을 탁본하여 보내는 부역이 힘들어서 비석을 깨뜨려 바다에 던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그러나 이웃이 척주동해비를 파손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허목에게 반감을 품은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허목은 척주동해비 건립과 거의 같은 시기에 죽서루 옆에 있는 응벽헌(凝碧軒)의 편액을 역시 그의 독특한 전서체인 미전체로 썼다. 그는 응벽헌의 편액을 갈필(葛筆)로 3개의 판목에 대자(大字)로 썼다. 그 글씨의 획은 등나무나 칡같이 구불구불하였다. 그러다가 1680년(숙종 6)에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허목의 관작이 삭출(削黜)된 이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누군가가 삼척 지역을 순시하면서 허목의 글씨라는 이유로 이를 깎아 없앴다. 서인들이 남인의 영수인 허목에 대한 반감으로 허목의 글씨마저도 철저하게 파괴하고자 한 것이었다. 아마도 척주동해비도 이 같은 똑같은 이유로 파손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인으로서 당시 송설체(松雪體)의 대가이던 판서 이정영(李正英)[1616~1686]이 허목의 독특한 서체인 미전체를 금지시키자는 주장을 하고 있음이 이를 짐작케 한다.
척주동해비는 허목이 복관(復官)되어 시호(諡號)를 받고 그의 서원이 건립되는 등 명예가 회복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재건립되었다. 1709년(숙종 35)에 삼척부사로 있던 홍만기(洪萬紀), 평해군수 한성흠(韓聖欽), 강원관찰사이던 송정규(宋廷奎)[1656~1710]가 주축이 되어 재건립하였다. 새롭게 건립될 비석에 새길 원문은 홍만기가 허목의 제자인 한숙(韓塾)[1646~1710]에게서 구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 건립된 척주동해비의 대자(大字)는 원 척주동해비의 구본(舊本)을 사용하고, 소자(小字)는 한숙에게서 구한 신본(新本)을 사용하여 비석을 새겨 삼척진영 성 안의 죽관도(竹串島)에 옮겨 세웠다. 이것이 현재 삼척시 정상동육향산에 있는 척주동해비이다.
척주동해비는 속칭 ‘퇴조비(退潮碑)’라고 불린다. 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가 극심한 동해 바다의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삼척에는 조수(潮水)가 수시로 시내까지 올라와 여름철 홍수 때에는 강 하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농작물이 유실되면서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이를 본 허목은 바다를 달래는 축문 형식의 「동해송」을 짓고 이를 비석에 새겨서 세웠다. 자연도 이 신비로운 문장과 글씨에 감동되었는지 그 후 조수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조수를 물리친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라고 부르게 되었다. 척주동해비는 4언 고시(古詩) 192자로 된 고풍체의 시이다.
[허목의 서예 세계]
척주동해비는 허목 서예의 진수를 보여 주는 대표작이다. 전체로는 자간(字間)과 행간(行間)의 상호 배열 및 호응이 전서(篆書)의 기본 포치(布置)를 잘 보여 준다. 또 중복되는 글자에서 보여 주는 자형(字形)의 변형과 그에 따르는 형질(形質)은 고문(古文)에 관한 해박한 지식 및 심미안을 보여 준다. 척주동해비는 허목 서예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허목은 서예에 관하여 정신미와 조형미가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서예는 형식미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쓰는 사람의 내면 세계, 즉 정신세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내면 세계가 필획에 전달되는 과정을 근현대 서예가 김응현(金膺顯)[1927~2007]은 “마음이 바르면 신기(身氣)가 안정된다. 신기가 안정되면 팔이 원활해지고, 팔이 원활하면 붓이 단정하다. 붓이 단정하면 묵(墨)이 뜻대로 되고, 묵이 뜻대로 되면 상(象)이 윤택하게 되어 뜻을 두지 않아도 뜻에 맞고 법을 의식하지 않아도 모두 법에 맞는다”고 하였다. 허목은 특정한 서예가의 서풍(書風)을 익히려면 그 서풍의 외양만을 모방하기에 앞서 그 서예가의 정신세계, 즉 필획에 응축된 서예가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유행하던 송설체는 외형미를 다듬는 데에만 급급하여 글씨의 품격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허목은 기교를 필요로 하는 외형미에 치우치는 행서나 초서보다 필법이 단순하면서도 기상이 근엄한 상고시대 서체인 전서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조형미와 정신미가 서로 조화를 이룬 독특하고 기고(奇古)한 서체인 미전체를 창안, 척주동해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허목의 글씨에는 그의 학문과 사상이 바탕으로 작용하였다. 학문으로 허목은 육경(六經)을 바탕으로 하는 고문학(古文學)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허목이 서예에서 추구한 것은 고문 제일주의였다. 허목은 학문으로 고문학을 추구하였듯이 서예에서도 선진고문(先秦古文), 즉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글씨를 추구하였다.
허목이 서예에서 추구한 또 다른 하나는 창고미(蒼古美)이다. 창고미는 아주 예스럽고 질박한 아름다움을 말한다. 고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허목의 글씨에는 창고미가 넘쳐흐른다.
한편 척주동해비 아래에는 우전각(禹篆閣)이라는 비각이 있으며, 이 비각 안에는 또 다른 비석이 하나 있다. 이 비석은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허목이 중국의 형산신우비문(衡山神禹碑文) 77자 가운데 48자를 택하여 글을 짓고 목판에 새겨 둔 것을 240년이 지난 1904년(광무 8) 9월에 칙사(勅使) 강홍대(康洪大)[1867~?]와 삼척군수 정운석(鄭雲晳)이 왕명에 의하여 돌에 새겨서 삼척의 현 위치인 육향산(당시 죽관도)에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