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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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시집 올 당시 장평은 열다섯가구가 마을을 이루며 살던 곳이었다. 여옥란이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텃골에 세 집, 무조골에 한 집, 씨시골에 한 집, 창골에 한 집, 반지에 두 집 등 이웃이라고 해도 한참동안을 걸어서 가지만 그래도 이웃이 있던 시기였다.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으로 큰 동네인 두천리로 강제로 이주하게 되면서 장평에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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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 여자들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길쌈이었다. 시집오기 전 길쌈을 할 줄 모르는 경우에도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길쌈을 배웠는데, 이는 가족들을 위한 옷을 만들기 위함도 있지만 가정경제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 들어서는 농사로는 살아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긴 겨울밤 길쌈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삼베장수가 이곳을 찾아 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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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송이는 먹기 힘든 음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과거의 송이는 두천에서 그리 흔하게 사용하는 식재료가 아니었고, 오늘날에는 귀한 환금작물로써 가정에서 먹을 수 없게 되어 귀한 음식이 되었다. 소나무 밑에서 조금씩 자라는 송이에 대한 가치를 마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천리의 할머니는 ‘아름드리 나무 밑에 쪼매 나는데 그게 먹을 것인지 알았는가 처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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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 있는 금속이나 돌로 만든 각종 유물에 새겨진 명문(銘文). 금석문(金石文)은 쇠로 만든 종이나 돌로 만든 비석 따위에 새겨진 글자나 도형으로 쉽사리 마모되지 않고 오랜 세월 견뎌내기 때문에 내구성이 높다. 따라서 고대 등 과거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고증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금석문은 크게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으로 구분된다. 금문은 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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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을 누볐던 선질꾼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등금쟁이, 바지게꾼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선질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행동과 또는 생김새에서 비롯된 새로운 용어이다. 김도현은 「울진 12령을 넘나든 선질꾼과 그 문화연구」에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선질꾼이었으며, 바지게꾼은 후대에 새로 생성되었고, 등금쟁이는 일부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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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1리 바깥말래에서는 골마와 주막거리에 위치한 할매와 할배에서 각각 제를 올렸다. 큰 마을인 골말은 할배를 모신다고 하여 이곳의 당은 ‘큰당’이라 불렀으며, 주막거리는 할매를 모신다고 하여 ‘할매’라 부른다. 그리고 할배당에서는 음력 정월 15일, 할매당에서는 다음날이 16일에 각기 따로 제를 올렸다. 두 마을이 따로 제를 올렸지만 동제에 관련된 모든 행사 및 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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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있는 조선시대 현령 김태희의 선정비.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82-4번지 죽변마을에 있으며, 울진읍 읍내에서 지방도 917호선을 타고 북면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하당리 삼거리에서 두천리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북면 두천리 외말래의 두천변에 있는 울진 내성행상불망비(內城行商不忘碑) 좌측에 있다. 김태희 선정비는 장방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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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1리는 바깥말래라 불리며, 북면에서 봉화로 넘어가는 마지막에 위치한 마을이다. 골마와 주막거리, 숲거리 세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골마와 주막거리는 마을 앞 들의 첫 번째 다리를 경계로 숲거리와 구분된다. 두천1리에 들어서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악구산’이 있으며, 마을을 지나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배나무목재(이목고개)에 다다르는데, 이곳은 두천2리와 두천1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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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1리 끝나는 시점 개울가에 위치한 내성행상불망비는 1890년(고종 27)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던 선질꾼들의 지위격인 접장 전한조와 반수 권재만이 그들의 상행위를 도와준 것에 대해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비를 선질꾼비라 부른다. 비에는 ‘내성행상불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와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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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에 속하는 법정리. 옛날 고을 원이 임지로 가는 도중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타고 온 말이 보이지 않아 하루 종일 찾다가 다래덩굴 밑에서 말을 찾은 데서 마을 이름이 말래[馬來]가 되었다. 두천(斗川)이란 이름은 말래의 ‘말’을 말 두(斗)자로 표현하고 ‘래’를 내 천(川)자로 표현하여 두천이 되었다. 본래 울진군 원북면에 속하였다가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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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 있는 성황신을 모셔놓은 제당. 울진에서 동서 방향을 연결하는 주 도로인 십이령 길은 출발 지점이 울진·죽변·흥부이다. 출발 지점에 따라 노정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결국 북면 두천리를 지나 바릿재와 샛재를 거쳐 봉화로 향하는 길이다. 즉, 바릿재 아래에 있는 두천리를 거치는 길이 울진과 경상북도 내륙인 봉화에 이르는 주요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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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를 흘러 하당리에서 남대천으로 유입하는 하천. 두천리를 흐르는 하천이라서 두천천이라 한다. 두천천은 두천리와 금강송면 소광리의 경계가 되는 산지에서 발원하여 안말래를 지나 북류하여 말래를 거쳐 동류하여 하당리에서 남대천에 유입되는 남대천의 상류 지천이다. 두천천 유역은 산간 지역이며 하류 하천변에 약간의 농경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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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 속한 각 면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 면사무소는 시(市)나 군(郡)에 속한 지방 행정 구역 단위의 하나이자 보통 몇 개의 리(里)로 구성된 면(面)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일선 공공 행정 기관이다. 2015년 현재 경상북도 울진군에는 북면, 죽변면, 금강송면, 근남면, 매화면, 온정면, 기성면, 후포면 등 8개의 면이 속해 있으며 각 면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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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이 백두대간의 산맥으로 가로막힌 울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한 길은 남쪽과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연결된 도로를 통해서이다. 서쪽으로는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야 하는데, 열두 개나 되는 산길을 넘어 봉화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그 길이 바로 십이령이다. 십이령은 울진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는 도로로 그 출발지점은 울진, 죽변, 흥부에서 각각 시작된다. 출발 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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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 전 새벽 4시 나무를 하러 간다. 나무는 한겨울을 날 수 있는 연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틈이 나면 모아두어야 한다. 식전에 나무 한 짐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게 겨울이 끝난 봄 마을 사람들의 하루는 시작된다. 아침 6시 아침을 먹고 논밭을 갈기 위해 집을 나선다. 12시 점심을 먹고 나면 잠시 숨을 돌리는가 생각되더니 다시 몸을 추스르고 밖을 향한다. 거름을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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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자연부락 장평에서 2001년 마지막까지 거주했던 여옥란은 봉화 석포 솔성골에서 태어났다. 십이령 고개길의 일부로써 선질꾼들을 위한 주막들이 성행했던 이곳에는 하나 둘 사람들이 떠나고 여옥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19살 시집와서 2001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던 여옥란에게 장평은 잊히지 않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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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리에서 식혜는 감주를 뜻하는 것이 아닌 물고기를 삭힌 것으로 양념장 또는 반찬으로 먹는다. 외부에서 식혜를 말할 때 감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곳에서 식혜는 말 그대로 삭힌 고기를 의미하여 가끔 웃지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식혜를 만들 때 사용하는 고기는 정해진 바가 없다. 바다가 멀었던 두천리에서 선질꾼들이 가져다 준 물고기는 좋은 식혜 재료가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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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에 속하는 법정리. 당거리[하당리]의 위쪽이 되므로 웃원당 또는 상원당이라 하였다가 행정구역 폐합 때 상당리가 되었다. 1600년경에 선비 고씨(高氏)와 추씨(秋氏)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다. 본래 울진군 원북면에 속하였다가 1916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덕구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상당리라 하고 울진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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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샛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성황사. 샛재 성황사는 샛재 바로 아래에 있는 성황사로서 처음에는 부상(負商)들이,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선질꾼들이 십이령을 오가며 장사를 할 때 이들이 주도하여 제물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으며, 선질꾼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빛내마을에서 제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샛재 성황사 내에 걸려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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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가 부족한 산골에서 여옥란 역시 선질꾼이 떠난 자리에서 개간한 농지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여옥란이 부르는 오늘날 화전을 ‘산전’이라 부른다. 갈아 먹을 땅이 부족하니 해마다 산에 불을 놓아 산전을 일구었다. 산전은 개인 산에서는 할 수 없고 국유림에서만 가능하였다. 국유림도 산전은 국가에서 금지해 놓은 일이니 몰래 몰래 숨어서 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먹고 살기 힘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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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생활에서 쌀밥은 구경하기 힘든 것 중 하나였다. 귀한 손님이라도 온다면 감자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쌀밥을 약간 얹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집안의 경제력이 있는 경우에만 이것이 허락되었으며, 그것도 힘든 경우에는 조밥 또는 보리쌀을 먹는다. 좁쌀을 넣은 감자밥을 만들 때는 감자를 함께 넣고 끓이지 않는다. 좁쌀을 끓이다가 감자를 넣고 함께 끓이는데 좁쌀을 넣으면 감자가 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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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있는 선질꾼 정한조와 권재만을 기리는 쇠로 만든 비. 조선 말기 선질꾼들은 2·7일장인 울진장과 3·8일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건어물·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십이령을 넘어 봉화장으로 가서 그 주위의 내성장·춘양장·법전장·재산장 등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포목 등을 물물 교환하여 되돌아왔다. 또한, 봉화 지역에서도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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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서울에서 봉화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형성되면서 울진군 북면에서 봉화를 연결하는 교통로인 십이령 길이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 도로가 되었다. 울진의 흥부장·읍내장·봉화의 내성장 등 장시가 열리면서 이들 장시가 십이령 길을 통해 연결되었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퇴조하자 그 역할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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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에 속하는 법정리.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전천동(前川洞)과 원곡동(元谷洞)에서 ‘전(前)’자와 ‘곡(谷)’자를 따 ‘전곡(前谷)’이 되었다. 1656년(효종 7)에 좌승지(左承旨) 남양인(南陽人) 방덕영(房德永)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울진군 금강송면의 지역으로서, 1916년 3월 1일 전천동·원곡동·승부동(承富洞)이 통합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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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이후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역사. 울진군은 1945년 해방 이후 강원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울진군은 6·25전쟁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1959년 9월 11일 사라(Sarah)호 태풍의 영향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62년 11월 21일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관할도가 이전되었다. 1968년 11월 2일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