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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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海邑城 |
영어의미역 | Pyeonghaeeup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평해리 1007-1[평해7길 5-2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희돈 |
성격 | 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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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고려 말 |
관련인물 | 공민왕 |
높이 | 약 152~455㎝ |
길이 | 잔존 길이 약 810m |
둘레 | 725m |
면적 | 55,350㎡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평해리 1007-1[평해7길 5-21]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평해리에 있는 고려 후기 석축 읍성.
[건립경위]
『관동읍지(關東邑誌)』와 『울진군지(蔚珍郡誌)』에서는 선덕왕 갑인(甲寅)에 석성(石城)으로 시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선덕왕 때에는 갑인이라는 간지가 없어 정확히 연대를 알 수 않다. 『여도비지(輿圖備志)』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축성 연대를 고려 말로 기록하고 있다. 1357년(공민왕 6) 정유(丁酉)에 기성현이 평해군으로 편입되면서 군소재지를 현재의 평해읍으로 옮기는 시점에 평해읍성이 처음으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1451년과 1492년경에 증축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높이는 5척·9척·10척·15척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는 2,325척이 가장 많고, 1451년 기록은 2,229척으로 조금 줄어들며, 1492년 기록에서 2,357척으로 다시 늘어나 있다. 2,325척을 당시의 교정 척도로 환산해보면 약 725m에 이른다.
[위치]
평해읍내를 가로질러 평해읍사무소를 중심으로 서편의 농협 창고와 동편의 평해향교를 감싸 안고 있는 반원형의 구릉이 있다. 이 농협 창고 서편에서 향교 담으로 이어지는 곳에 성벽의 석축이 확인된다.
평해읍성은 동해안에 위치하여 동쪽은 동해이고, 서쪽은 태백산맥으로 막혀 있다. 남쪽으로는 넓은 평해들이 펼쳐져 있으며 서에서 동으로 관류하는 대명천이 있다. 월송만호진과는 2㎞ 거리에 있으며, 평해읍의 옛터인 기성읍성과는 7㎞ 거리에 있다.
영덕에서 울진을 향하는 국도 7호선을 따라 올라가면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평해교를 지나 500m 거리에 평해읍이 있다. 평해읍은 울진군 내에서는 울진읍 다음으로 큰 행정 규모와 주민을 가지고 있다. 읍내 자연 마을의 지명 중에는 상성리(上城里)·하성리(下城里)·성안 등이 보이고 있어 이 일대에 성과 관련 있는 유지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형태]
평해읍성은 평해읍사무소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긴 타원형을 이룬 평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울진군 내의 여러 읍성에서 볼 수 있는 앞쪽이 터진 凹형의 삼태기형이다. 군 내에서 조사 확인된 여러 읍성지 가운데 유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편이다.
동문지(東門址)는 현재의 읍사무소 앞 도로상으로 추정되나, 시가지 개발로 인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농협 창고 서편에서 시계 방향으로 살펴보면, 농협 창고 서편에서 북쪽으로 약 36m 구간인 934-9번지 일대는 석성의 유지가 매우 잘 남아 있다. 성돌의 크기는 중석이 평균 95×40㎝이며, 대석이 평균 120×75㎝ 정도이다. 성벽은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성돌의 끝 모서리를 치석하여 귀죽임으로 처리하였다. 현재 높이는 3.2m 전후이며, 6~8단 정도 엇갈려쌓기로 거의 수직되게 쌓아올렸다.
성벽은 이 구간의 끝점에서 민가의 건립과 마을의 도로 개설로 인해 40여 m 정도 끊겨버리고 다시 민가의 담 축대석으로 이용된 구간이 시작된다. 시작점인 담 축대석 일부를 제외하고, 성벽은 대체로 양호한 편으로 길이는 90m 정도 된다. 다음 구간은 원만하게 곡선을 그리는 구간으로 성벽 상면에는 경작에 의해 흙이 퇴적되어 있어 마치 토성처럼 보이나, 내부는 모두 석성의 원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상면 폭이 4.5m 전후이며, 협축법으로 축조하였다. 성 안쪽의 높이는 2.5m이며, 성 바깥쪽의 높이는 2.5~3m 정도 남아 있다.
민가의 담 축대석으로 시작된 구간의 시작점에서 약 260m 거리에 북문지(北門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문지는 이중 구조로 원 성벽에서 일단의 턱을 만들고 서벽 성체의 아래로 동벽 성체의 하단이 내려가 문 입구가 밖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했다. 문지의 폭은 370㎝이며, 높이는 550㎝에 이른다.
문지와 연결된 성체의 상면에서 와편이 다수 채집되고 있어 문루를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 북문지 일대 구간 성체는 계속 협축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성 상면의 폭은 4~5m 전후이다. 성 안쪽은 경작에 의해 정확한 높이를 알 수는 없으나, 성 밖은 수직에 가까운 5~7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북문지에서 약 170m 거리에는 성벽을 깨고 출입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당시의 문지가 아니라 근년에 성 안과 성 밖을 편리하게 왕래하기 위해 개설해 놓은 듯하다. 다음 115m는 성 상부의 유실이 심한 편이며, 농로 개설에 의해 성벽 일부가 절단되었다. 잘려 나간 성벽 단면을 보면 성벽의 내부는 잡석으로 막채움되어 있다.
이 구간 끝지점에 다시 성벽을 가로지르는 통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것이 당시의 문지인지 아니면 그후에 왕래의 편리를 위해 절개한 성벽인지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확인할 수 없다. 다음 구간은 평해향교의 북쪽 담에 해당되는 구간으로 260m에 이른다. 향교 담의 하부에는 원래의 석축 유구가 정연하게 남아 있다.
이렇듯 평해읍성은 농협 창고 서편에서 시작하여 향교 담을 거쳐 평해2리 900-9번지에서 끝나고, 나머지 읍성의 연장선은 시가지 개발로 인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다른 읍성지나 산성지에 비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성벽의 잔존 길이는 약 810m이며, 성 안의 면적은 약 55,350㎡이다.
[현황]
산성 내 925-1번지 부근은 동헌지(東軒址)로 전해온다. 1914년까지 평해군청 업무를 이곳에서 보았으나 1914년에 폐지되어 지금의 읍사무소 자리로 읍의 치소를 옮겨가게 되었다. 그후 폐허가 된 이곳에 마을 주민이 와서 동헌의 주초석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지금의 와가를 지어 생활하고 있다. 동헌지의 동편으로는 아담한 정자가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동헌의 남서쪽으로 100m 거리에는 감옥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만 남아 있다.
당시 동헌의 주초석의 주간 거리로 볼 때 건물은 정남향이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주간 거리는 정면 사이가 서쪽에서부터 291㎝·291㎝·345㎝·306㎝이며, 측면 사이는 남쪽에서부터 241㎝, 246㎝이다. 주초석은 원형의 돌출된 형식으로 원주를 떠받들게 되어 있으며, 직경 44㎝, 높이 13㎝이다.
[의의와 평가]
평해읍성이 위치한 곳은 지형이 기성읍성이 위치한 곳과 매우 유사하다. 바다와 가깝고 큰 강을 끼고 있어 어패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넓은 들판이 있어 농경 생활도 편리하다. 얕은 구릉지대, 특히 기성읍성과 같이 반원상의 삼태기형 구릉을 형성하고 있어 추위는 물론 적과 맹수로부터의 방어에 매우 적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지표 조사에서 선사시대의 유물편은 채집되지 않았으며, 삼국시대의 토기편들만 일부 확인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두고 정밀하게 조사하면 기성읍성과 같이 청동기시대 전후의 유물편도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