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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010
한자 壬辰倭亂 最初- 陸地 戰鬪 勝戰地 蟹蹂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부흥로 411[연곡리 산28-9]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도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2년 5월연표보기 - 해유령 전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7년 10월 13일연표보기 - 해유령 전첩지, 경기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
소재지 해유령 전첩지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부흥로 411[연곡리 산28-9]지도보기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을 가리킨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를 포함시켜 말한다. 우리 민족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던 임진왜란이라 하면, 단연 이순신(李舜臣) 장군으로 대표되는 수군과 무능하고 무책임한 관군을 대신하여 동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수많은 의병·승병들의 눈부신 활약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곳 양주 땅에 임진왜란 당시 육지 전투의 첫 승전보를 울린 싸움이 있었으니 해유령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하여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 전투 승전지인 해유령과 경기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된 해유령 전첩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오늘날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유령은 게가 넘어간 고개이다]

해유령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피난말에서 광적면 비암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게가 넘어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인근 노고산에 노고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노고할머니가 오줌이 마려워 다리 한쪽은 노고산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반대편 도락산에 걸친 후 광적면 우고리광석리 경계 지점 부근 황새등고개에 있는 요강바위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그런데 요강바위의 오줌이 넘치면서 인근 개울에 뜨거운 오줌이 흐르게 되었다. 개울에 살던 민물 게들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이 고개를 넘기 시작하여 이웃한 광적면 비암리와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쪽으로 갔다고 한다. 실제로 연곡리에는 민물 게가 보이지 않지만 비암리와 발랑리에는 민물 게가 있다 한다. 혹은 400여 년 전 소나기 빗줄기를 따라 양주 게가 파주로 넘어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적성현의 토산물 가운데 하나가 게[해·蟹]라고 하였다. 고개의 이름은 대개 게너미고개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해유령(蟹踰嶺)·해현(蟹峴)·해유현(蟹踰峴)이라고 한다. 게너미고개는 16세기 중반의 사실을 전하는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처음 등장한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5년[1592] 5월 1일조에는 해령(蟹嶺)이란 지역이 등장하는데, 이는 게너미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임진왜란 종료 후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해유령대첩(蟹踰嶺大捷) 관련 기사가 나오고 있다.

한편,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는 해유령이 치소에서 서쪽으로 12㎞[30리] 되는 거리에 있고, 파주로 통하는 길이라고 소개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1864]에서는 해유현은 선조 25년 4월 부원수 신각(申恪)이 처음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따라 한강을 방어하였는데, 김명원의 군사가 궤멸되자 신각은 한강으로부터 따라 달려온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에서 흩어진 군대를 수습하였다. 때마침 함경남도병사 이혼(李渾)의 장병들이 와서 원조하니 군대를 합하여 진을 치게 되었다. 드디어 해유현에서 왜병을 만나 요격하여 격퇴하니 70여 명을 목 베었다고 하였다.

한편, 해현이란 이름으로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1767~1776]·『동국여도(東國輿圖)』[1801~1822]·『청구도(靑邱圖)』[1834]·『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에, 해유령이라는 이름으로 『해동지도(海東地圖)』[1760]·『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에서도 확인된다. 이와 같이 해유령, 즉 게너미고개는 우리 역사에 치욕을 남겼던 임진왜란 당시 육지 전투 최초의 승전지로서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다.

한편, 해유령 부근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여러 지명들이 산재해 있다. 우선 해유령 아래 동네에는 임진왜란 때 해유령 전투에서 죽은 말들을 묻어 만든 무덤이라는 말무덤이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부근에는 임진왜란 때 신각 장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진터라고 불리는 곳도 있다.

[해유령 전첩의 내용은 애처롭다]

1592년 4월 왜는 자신들의 내부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총이라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동래포구를 통해 상륙한 왜군은 속전속결의 작전을 펼치며 전쟁 발발 20여 일만에 도성인 한양에 도착하게 된다. 이에 선조는 몽진을 결정하여 피난길에 오르고 도성 방어의 책임은 당시 도원수였던 김명원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5월 초 도성에 도착한 왜군은 한강 방어의 책임을 맡았던 도원수 김명원이 한강에서 후퇴하여 임진강에 진을 치고, 도성 방어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수성대장 이양원과 부원수 신각이 한양을 포기하고 양주목으로 물러나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불태우고, 궁궐을 노략질하는 치욕적인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이 도성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당시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은 체직시키고, 부원수 신각은 군율에 따라 엄격하게 죄를 주자는 논의를 진행하였다. 물론 당시 신각은 도성을 방어하는 도중 이양원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면서 도망쳤다. 그런데 5월 초 왜적들이 양주 지방을 염탐한다는 소식을 듣고 함경병사 이혼의 군사와 합류하여 해유령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적을 급습하여 70여 명의 왜병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도성을 침탈한 왜군은 몽진하는 선조를 따라 북진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 때 지나야만 했던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양주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전투사상 최초의 육지 전투인 해유령 전첩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벌어진 해유령 전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20일 처음 나타난다. 즉 돌격대장이었던 인천부사 이시언(李時彦)이 양주 장수원 싸움에서 적병 3명을 죽인 공이 있으니, 해유령 싸움에 대한 논공행상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의 기록을 통해 당시 양주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일단 해유령 전투와 장수원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자세한 상황은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신을 보내 부원수 신각을 참하였다. 신각은 처음에 부원수로서 김명원을 따라 한강에서 방어했었는데, 김명원의 군사가 패하자 이양원을 따라 양주에 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였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병사 이혼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하였는데, 여염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해유에서 습격하여 패배시키고 70급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높았다. 그런데 이양원은 당시 산골짜기에 있었으므로 상황의 보고가 끊겼고, 김명원신각이양원을 따른다고 핑계대고 도망쳤다는 장계를 올려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홍이 그대로 믿고서 선전관을 보내 현장에서 베도록 하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 승리를 거두었다는 글이 이르렀으므로 임금이 뒤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신각이 비록 무인이기는 하나 나라에 몸 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는데, 죄 없이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위의 기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부원수 신각이 처음에는 도원수 김명원을 따라 한강 방어에 참가하였는데, 김명원의 군사가 패하자 이양원을 따라 양주에 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규합하고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병사 이혼의 부대와 연합, 해유령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런데 당시 이양원은 산골짜기에 있었으므로 상황 보고가 끊겼고, 김명원신각이양원을 따른다고 핑계대고 도망쳤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려 결국 왕명으로 선전관을 보내 명령 불복종의 죄로 참형에 처하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 해유령 전첩의 상황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곧바로 신각의 참형을 중지시킬 것을 명하였으나 이미 신각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였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에 직접 참여한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에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결국,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 전투 승전인 해유령 전첩을 통해 조정에서는 전쟁의 초기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황 보고의 미비와 전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불찰 때문에 장수를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해유령 전첩은 현재 진행형이다]

해유령 전투에서 패전을 당한 왜군은 다시 군영을 가다듬고 양주에 대한 총공세를 진행한다. 5월 28일 비변사의 전황 보고를 보면 양주가 매우 위급하여 토병 3백 명 중에서 1백 명을 들여보낼 것을 청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양주에서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물론 그러한 싸움은 오래 가지 못하고 양주는 왜적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한편, 전쟁 당시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한 양주, 장단, 과천, 금천, 광주 등에서 적을 토벌한 군민에 대하여 표창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양주에서도 의병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해유령 전투의 승전 소식을 듣게 된 양주와 인근 지역의 백성들은 왜병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과 불굴의 나라 사랑 정신으로 무장하여 왜군에 맞서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왜병에게 대항하여 전과를 올리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바로 해유령 전첩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전쟁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을 이끌면서 남해와 서해 바다를 지켜내고 결국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혁혁한 공과 비교하면 별 것 아닐지 모르지만, 당시 육지 전투에서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밀리던 전쟁 상황에서 왜병 70여 급을 목 베는 전과를 올렸던 해유령 전첩은 전쟁 발발 초기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이며, 아울러 현재의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서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해유령 전첩지에는 1977년 4월 21일 높이 10.6m, 둘레 4.8m, 기단 면적 132m의 기념비를 세웠으며, 국난 극복의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해유령 전첩지는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아울러 기념비 밑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신각, 이양원, 이혼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충현사(忠顯祠)가 있어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해유령 전첩 추모 제향은 1980년 4월 6일 처음 시작됐으며 충현사 제전위원회가 매년 5월 19일 정기적으로 제향을 올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신각 장군의 고귀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2011년에는 충현사 제전위원회의 주관으로 지역 단체장 및 주민과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유령 전첩 추모 제향을 봉행했다. 2011년 해유령 전첩 추모 제향에서는 현삼식 양주시장이 초헌관, 민영신 대한노인회 양주시지회장이 아헌관, 조의동 충현사 제전위원회 위원장이 종헌관으로 추대되어 행사를 진행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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