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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380
한자 高句麗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집필자 홍정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369년 - 고구려 고국원왕, 백제 침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371년 - 백제 근초고왕,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 사살
특기 사항 시기/일시 396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 한성을 침공하여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475년 - 고구려 장수왕, 위례성을 함락하고 백제 개로왕을 죽임, 한성 백제 멸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550년연표보기 - 백제 성왕, 고구려로부터 양주 지역을 수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553년연표보기 - 신라 진흥왕, 고구려를 쳐서 양주 지역 점령
소재지 매성현 - 경기도 양주시
소재지 아단성 -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성
소재지 불곡산 보루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지도보기
소재지 도락산 보루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지도보기

[정의]

삼국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을 점령했던 국가.

[개설]

백제와 고구려가 양주 지역을 놓고 대치하기 시작한 것은 대방(帶方)[경기도 북부 및 황해도 일원]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溫祚) 집단이 고구려에서 나왔으므로 두 나라는 건국의 연원이 같은 형제국일 수도 있었지만, 대방 고지를 둘러싼 갈등이 깊어지고, 백제가 북방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전사하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본격적인 공략에 착수하였다.

[양주를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

광개토대왕은 대방 고지로 진출하려는 백제군을 임진강 상류에서 연이어 대파한 후 396년 대군을 친히 인솔하여 백제를 쳤다. 그는 한강 어귀에 상륙하여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인천에서 한강을 거슬러 위례성으로 진군시키고, 다른 부대는 임진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와 한탄나루에서 포천 지역을 경유하여 아차산, 남양주 일대를 우회하여 위례성으로 남하하는 양면 전술로 마침내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 상황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의 광개토대왕비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은 거듭되었고 장수왕도림(道琳) 같은 첩자를 백제 내부에 침투시키며 혼란을 유도하였고, 결국 위례성을 함락시켰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475년(장수왕 63)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 경(扶餘敬)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라고 한성 백제의 몰락을 한 줄의 기사로 요약했지만 그 후 발굴된 풍납토성 현장의 모습이나,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비롯한 2차 사료의 내용에는 한성 백제 멸망 당시의 참혹한 상황이 여러 잔편들로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개로왕의 왕자 문주(文周)[또는 문주(文洲)]는 잔존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웅진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고 동성왕, 무령왕 등의 노력으로 국력을 회복한 이후, 성왕은 다시 수도를 사비로 옮기며 고토를 수복하기 위한 절치부심의 노력을 거듭하지만 끝내 백제의 한강 유역 수복은 실패하였다.

[고구려의 양주 경영]

고구려는 양주 지역을 경영하기 위하여 양주 지역에 매성현(買省縣)을 설치하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마홀(馬忽)로 불렸는데 고구려어에서 매(買), 미(彌), 마(馬)는 모두 물[水]을 뜻하는 말로 매성현의 의미는 ‘물골’이 된다. 양주는 한강 하구에 상륙한 고구려군이 임진강의 호로나루를 건너 감악산을 넘는 장단로와 임진강을 거슬러 대탄나루를 건너 남하하는 삼방로의 양대 도로가 다시 만나는 요충이다.

한수(漢水) 이북을 제압하고 통치하는 핵심 전략 지역이었으므로 고구려는 양주에 남평양을 설치하여 한강 유역을 경영하는 중핵으로 삼았다.

동시에 고구려는 양주를 다시 찾으려는 백제의 기도에 맞서서 임진강에서 한강에 이르는 양주 전역에 대규모의 관방 시설을 설치하게 되는데, 광진나루의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보루들, 사패산, 천보산, 불곡산, 도락산에서 호로나루의 호로고루성과, 당포성 등으로 이어지는 여러 보루와 산성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산성과 보루에는 적정 규모의 고구려군이 주둔하여 백제군의 북상에 대비하는 한편 치안 임무도 수행하였다.

[양주를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의 대립]

백제의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신라, 가야, 왜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충실히 하여 550년 마침내 양주를 비롯한 옛 한성 백제의 고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내 고구려의 강력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고구려, 백제 양국이 모두 지쳤을 때에 신라가 그 틈을 타서 553년에 양주를 장악하였다. 이에 격분한 백제는 급히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 싸움에서 성왕이 전사하며 대패하여 마침내 양주는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고구려는 말갈병까지 동원하며 양주 지역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신라에게 양주를 내어주게 되었다. 이후 신라는 한강 유역을 교두보로 하여, 당과의 해상 통로를 확보하고 대당 동맹을 공고히 하는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하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기반으로 활용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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